무대는 순백의 화선지요, 무용수의 몸짓은 수려한 붓놀림이었다.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를 형상화한 절제된 동작은 무대를 웅장한 수묵화로 만들었다. 신들린 붓질을 60분간 숨죽인 채 응시하던 관객은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야 억눌렀던 탄성을 터뜨렸다. 이날 홍콩의 밤은 그렇게 진한 ‘묵의 향기’(墨香)에 취했다.
지난 26일 홍콩 완차이의 공연예술아카데미(APA) 내 리릭극장. 1,100개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은 공연 후 무용수 한명한명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힘찬 박수를 보냈다. 갈채의 주인공은 21명의 국립무용단 무용수와 공연의 총 연출자인 디자이너 정구호, 안무가 윤성주다. 제44회 홍콩예술축제의 초청작으로 해외 관객과 만난 ‘묵향’은 한국 전통 소재를 세련되게 그려내며 해외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 행사에 한국 전통 무용이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묵향은 무용가이자 안무가였던 최현의 유작 ‘군자무’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디자이너 정구호가 연출을 맡아 지난 2013년 초연, 국내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날 공연은 안무·의상·무대·음악까지 ‘한국 전통의 멋’을 담백하게, 그러나 세련되게 담아냈다. 화선지를 연상케 하는 4폭의 흰 막이 무대의 전부였다. 그 위에 꽃분홍 저고리를 입고 등장한 여성 무용수들은 군무로 하나가 되었다가 독무로 쪼개지는 흐름을 반복하며 막 움트는 매화 봉오리를 만들어냈다. 녹색 저고리의 남녀 무용수는 과감하고 절도 있는 동작을 펼쳐내며 붓을 들고 난을 치는 선비를 표현했고, 노란색의 풍성한 치마가 돋보이는 무용수는 등장만으로 오상고절의 자태를 뽐냈다. 긴 장대를 쥐고 유연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춤을 추는 남성 군무는 대나무(군자)의 유연함과 올곧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저마다의 색채와 동작으로 빛나던 무대는 종무(終舞)에서 다시 하나 되어 만난다. 가야금과 바이올린 선율 위에 내려앉은 군무,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조화는 오랫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는 진정한 묵향이었다.
홍콩 현지 관객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26~27일 2회분 공연표는 일찌감치 매진됐고, 공연 뒤 열린 ‘관객과의 대화’ 시간도 열기가 가득했다. 홍콩에 사는 영국인 빌 리틀맨(70)은 “우아한 몸짓에서 동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기교가 환상적이었다”며 “군무와 독무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홍콩인 안드레이(24·여)도 “각 무용수가 만드는 조화로운 움직임이 우아했다”며 “동서양의 현악기가 함께 울려 퍼진 종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극찬했다.
공연 관계자들도 예상보다 뜨거운 해외 반응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구호 연출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깊이 있는 감상평이 오고 가 놀랐다”며 “작품을 만들 때 ‘관객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많은 관객이 정확하게 포착해 관람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밝혔다. 안호상 국립극장장도 “이번 공연은 관객의 절반 가까이가 홍콩에 거주하는 (홍콩인이 아닌)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며 “같은 문화권이 아닌 영미·유럽 관객에게 한국 전통문화가 얼마나 어필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한편 묵향은 오는 6월 프랑스 리옹에서 열리는 레뉘드 프루비에르 페스티벌에서도 초청공연을 펼친다.
/홍콩=송주희기자 sso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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