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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이슈와 가깝지 않은 필자에게도 근자에 자주 듣는 단어가 있다. 바로 '금수저' '흙수저'라는 키워드다. 2015년 겨울로 접어드는 즈음 과학고를 조기 졸업한 한 일류대 학생이 자살을 예고한 뒤 건물에서 투신해 명을 달리했다. 이 학생은 투신하기 전 자신의 페이스북과 학내 온라인 유서에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수저 색깔"이라는 말을 남겼다.
고인은 어릴 때부터 수재로 인정받았을 터인데 대학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보다 부모의 재력으로 평가받고 좌절했을 청년의 아픔이 안쓰럽다. 현대판 계급차별로 발생하는 문제를 한 개인의 문제로 돌려야 하는가. 혹 사회의 모순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인류가 형성된 후 갑을로 나눠지는 인간성의 모순이라고 해야 할까.
능력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사회 구조적 모순과 불평등에 괜한 분노심이 일어난다. 고대인의 사회도 이와 비슷했다. 카스트(caste) 제도인데 지금도 인도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도 계급 차별이 심했다.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크샤트리아(왕족)·바이샤(평민)·수드라(천민) 계급으로 나눈다. 4계급 이외 카스트에도 들지 못하는 아웃카스트도 있다.
부처님이 출가해 성불하신 뒤 부처님의 고향 석가족 왕족들이 많이 출가했다. 불교교단의 우바리 스님은 석가족 가운데 일찍 출가한 편에 속했다. 그는 출가하기 전 왕족들의 머리카락을 깎아주던 이발사로서 천민 계급이었다. 그런데 왕족 출신 비구 스님들은 우바리 같은 천민을 출가 교단에 받아들이는 것조차 달갑지 않게 여기며 부처님의 사상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왕족 출신 비구들은 '왜 부처님께서 우바리와 같은 하천한 사람을 교단의 구성원으로 만들어 우리까지 하천하게 만들까? '천민 출신 비구가 이 교단에 있으니 일반 신자들이 우리 교단에 대해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라고 뜻을 모아 부처님께 항의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천민이든 왕족계급이든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씀하셨다. 또 왕족 출신 비구들이 천민 출신 비구보다 늦게 출가하면 교단에서는 왕족이라도 천민 출신 비구에게 선배대접을 해야 했다. 이 점에 불만을 품고 왕족 출신 비구들이 부처님께 항의했지만 이 또한 부처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처님을 찬양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은 결코 아님을 밝혀둔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든 누구나 평등(和諍)하다고 주장했던 신라의 원효 스님도 있다. 원효 스님이 활동하던 당시 신라 사회는 왕실과 귀족 중심의 불교였다. 원효는 귀족불교에서 탈피해 지방의 촌락·거리 등을 다니며 무애(無碍)박을 두드리고 걸림 없는 해탈 경지의 (어려운) 경전 구절을 민요가락으로 불렀다. 또한 천민들이 거주하는 촌락과 저잣거리에서 무애박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춤을 췄다. 바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었다. 민중에게는 '아미타불'이라는 단어가 부처님 존함이 아닌 고통을 벗어나 행복으로 건너게 하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이 존재한다. 인류의 성인들은 하나같이 존재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국가를 떠나 남녀를 떠나 인간의 생명으로 태어난 그 자체만으로도 고귀하다. 그런데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수식어를 고귀한 존재 앞에 붙여야 할까. 젊은 청년들이여, 이런 단어에 멍들지 말자. 모순덩어리 단어에 청춘까지 저버리면서까지 상처받을 필요가 있는가. 두려워 말라. 자존감을 갖고 당당하게 살라.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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