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론주의·차베스그룹 잇따라 몰락
아르헨티나에선 12년, 베네수엘라에선 17년, 브라질에서는 13년간이나 굳건하게 이어왔던 좌파 정권이다. 베네수엘라는 올해 물가상승률이 160%까지 치솟았고, 아르헨티나 경제는 고물가·저성장의 덫에 빠졌으며, 브라질 경제도 마이너스 성장률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남미 유권자들이 경제를 망친 책임을 좌파 포퓰리즘 정당들에게 묻고 있는 셈이다.
요즘 남미 정치를 보면 영화 ‘에비타’가 떠오른다. 1940년대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국민의 성녀(聖女)’로까지 추앙받았던 에바(마돈나)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좌파 포퓰리즘 정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바는 1946년 남편인 후안 페론(조나단 프라이스)의 대통령 당선 이후 노동자와 여성 등 취약계층의 편에서 정치를 주도했다. 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입법, 여성 노동자의 임금인상, 남녀평등 헌법 보장,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이 그녀의 힘으로 이뤄졌다. 에바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까지 만들어 전국 곳곳에 취약계층을 위한 병원과 학교·고아원 등을 세웠으며, ‘에바 병원기차’를 타고 아르헨티나 전역을 누비며 무료진료에 나서기도 했다.
#‘경제부국’ 아르헨티나 경제, 에바 이후 쇠락
에바가 나타나면 대중은 그녀의 애칭인 “에비타(작은 에바)!”를 연호하며 열광했다. 그녀는 대중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즉흥적으로 선사했고, 에바와 페론 정부에 대한 지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영화 장면에도 등장하지만 심지어 에바는 열광하는 군중을 향해 빳빳한 지폐 다발을 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에바의 포퓰리즘은 아르헨티나 경제를 뒷걸음치게 했다. 페론 정부의 보호주의 경제에 포퓰리즘으로 인한 재정의 과다지출이 더해지면서 나라살림은 허약해졌고, 노동자와 서민의 삶도 개선되지 못했다. 1930년대만 해도 세계 7대 부국에 들어갔던 아르헨티나 경제가 페론주의를 거치면서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에바는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
이에 언론과 지식인들의 페론주의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 페론 부부는 저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설득하는 노력 대신 독재를 휘둘렀다. 정적(政敵)과 지식인에 대한 무차별 체포에 고문까지 서슴지 않았다. 영화에서 스토리텔러 역할을 맡은 체 게바라(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이 무슨 광대짓이야?”라고 개탄한 것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포퓰리즘 정치는 경제를 해치기 마련이다. 나라살림에서 수입(조세)보다 씀씀이(재정지출)가 커져 부채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국가부도를 피하기 어렵다. 아르헨티나가 반복적으로 국가부도에 직면한 것도, 그리스가 지난해 디폴트를 선언한 것도 선심성 복지정책을 남발한 탓이 크다.
에바는 악녀(惡女)였나 성녀(聖女)였나. 달콤한 포퓰리즘으로 국고를 탕진하고 경제를 망쳤다는 점에서 악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하층민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로 일컬어지는 에바는 그런 면에서 야누스의 얼굴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포퓰리즘도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선한 겉모습과 권력욕에 취한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추악한 속내의 두 얼굴을 가졌다.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한국 정치는?
한국도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당들은 저마다 국민을 위한다며 한 표를 호소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헬무트 노포스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처럼 유권자와 정부를 묶고 있는 것이 경제”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경제를 살리지 못한 정치가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는 없다. 최근 남미 좌파 정부의 퇴조도 이를 입증해준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현 정부 집권 이후 한국경제는 성장도 고용도 소득도 뚜렷하게 개선된 게 없고, 가계부채만 심히 악화됐을 뿐이다. 그런데도 총선을 앞둔 지금 집권당의 승세가 압도적이다. 봐도봐도 참 아리송한 것이 요즘의 한국 정치다. /문성진기자 hnsj@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