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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에 첫 여의도 입성… '최연소·최초·최다' 기록 갈아치워
5·16소식에 상경… 군정 참여 요청 뿌리치고 가시밭길 선택
40대 기수론 내세우며 대선 경선 출마… DJ에 아름다운 승복
하나회 해체 등 '전광석화 개혁'으로 초반 지지율 90% 넘겨
역사바로세우기 단행…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법정에 세워
외환위기·김현철 국정개입 논란… 영광 뒤로하고 쓸쓸한 퇴임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삶은 크게 민주화에 인생을 건 투사로서의 시기와 오랜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문민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로 크게 나뉜다. 야당 정치인 시절에는 박정희·전두환 두 대통령의 온갖 탄압과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야당 당사를 포위한 경찰서장의 따귀를 올려붙일 정도의 '투사형 정치인'이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도 과거 군사정권을 쿠데타 세력으로 규정한 뒤 '역사 바로 세우기'를 명분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할 정도로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 노동법 날치기 파동으로 힘이 빠졌고 아들 김현철씨의 국정개입으로 내리막길을 걷다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재임 시의 모든 영광을 잃고 퇴임했다. 그러나 그는 퇴임 이후에도 한국 보수정치의 상징으로 남았다. 직접 키운 정치 인재들이 정치권에서 꾸준히 활약하면서 보수 문민세력의 큰 어른으로 생애를 마치게 됐다. 그리고 이번 서거로 YS라는 애칭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과감한 정치인의 별명으로 영원히 남게 됐다.
대통령이 꿈이던 부잣집 외아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20일 경상남도 거제도의 바닷가마을에서 1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김홍조옹은 멸치 어선을 10척 이상 보유한 부자였다.
YS는 어릴 때부터 배짱이 남달랐다. 일제 시기 말 통영중학교에 다니면서도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말을 자주 해 일본인 학생들과 마찰이 많았다. 1945년 경남중학교로 전학해서는 자신의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놓았다.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업에는 큰 뜻이 없었던 듯하다. 대부분의 과목이 B·C·D였다. 대신 2학년 때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해 2등을 차지, 외무부장관상을 수상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은 장택상이었고 훗날(1951년) YS는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954년에는 자유당 후보로 고향인 거제에 출마해 26세에 최연소로 제3대 국회에 진출한다.
이 직후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했다. YS는 "이 당은 안 되겠다"며 탈당해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길고 긴 야당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결혼은 1951년 고무신 공장집 딸이던 손명순 여사와 했다. 2남3녀를 낳았는데 차남 현철씨는 훗날 정치인이 된다.
승승장구하는 청년 정치인
YS는 1958년 지역을 부산으로 옮겨 출마하지만 석연치 않게 낙선한다. 1960년에는 가슴 아픈 일을 겪는다. 거제도 고향 집에 무장공비가 침입해 어머니 박부련 여사를 살해한다. 이후 군사독재 시절 사상을 의심하는 식의 공격을 받을 때는 "북한 무장간첩에게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라고 항변했다.
1961년 5월16일 군사정변 소식은 거제에서 들었다.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간 뒤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손발이 묶이게 된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YS에게 공화당 창당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한다. 군의 정치참여는 잘못된 생각이니 원래 약속대로 원대복귀하라고 주장했다. 이를 시작으로 YS는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하게 된다.
시련을 자양분으로… 巨山이 되다
YS가 젊은 나이에 야당 지도자이자 거물 정치인이 된 것은 3공화국 시절에 나온 '40대 기수론'을 계기로 한다. 1969년 김대중(DJ), 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젖비린내 난다"는 원로들의 '구상유취론'을 물리치고 1971년 대통령선거를 위한 후보 경선에 나선다.
YS는 접전 끝에 DJ에게 패하게 되지만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곧바로 승복한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 드문 '아름다운 승복'으로 기록됐다.
군사독재 맞서 목숨 건 투쟁
YS는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했지만 가택연금됐다. 이 무렵 하루 6갑 정도 피우던 담배와 밤새 마시던 술을 끊었다.
YS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정권을 강력 규탄했고 이듬해 신민당 당수가 된다. 미국에 가서도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고 1975년 미국 뉴욕타임스는 그를 '금주의 인물'로 선정했다. YS의 투쟁을 세계가 주목하게 된 것이다.
1975년에는 청와대를 찾아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한 뒤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유신체제의 모순과 인권탄압 등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서는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스스로를 위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준비를 갖추기 바란다"고 되풀이해 말했다.
최대의 시련은 1979년에 찾아온다. 가발회사 YH무역의 여공들이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하자 YS는 경찰서장의 빰을 때리며 이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강경 진압 도중 한 명이 추락 사망하자 YS는 "살인정권은 반드시 쓰러진다"고 규탄했고 이는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된다. 이때부터 정권은 YS를 정치적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후보단일화 실패… 제2야당의 시련
1979년 국회는 YS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했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서거하자 YS가 유신 후반기에 입버릇처럼 했던 유명한 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반드시 온다'는 말이 전국에서 회자된다.
독재가 끝난 1980년 봄, 이른바 서울의 봄 정국에서 그는 전두환의 신군부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김종필·김대중과 경쟁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5월17일 신군부에 의해 전격적으로 가택연금을 당했고 결국 신군부의 집권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1987년에는 DJ와 통일민주당을 만들고 민주화 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가 회복됐지만 DJ와의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다. 이는 민주화를 지지하던 국민의 가슴에 큰 상처를 준 사건으로 역사에 남는다. YS는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28%를 득표해 2위를 했고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YS 세력은 수도권에서 DJ의 평민당에 패하면서 제2야당이 됐다. YS의 대권가도는 이것으로 저무는 듯했지만 그는 인생 최대의 정치적 승부수를 감행한다. 한국 정치지형을 영원히 바꾼 사건, 바로 3당 합당이다.
지지세력 이탈 아픔 겪은 결단
1990년 1월22일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TV 생중계로 세상에 알려진다. TV에서는 노태우 대통령과 YS, 그리고 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손에 손을 잡고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 제3야당인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인생 대부분을 독재와 싸우는 데 바친 투사가 군사독재의 연장선에 있는 민정당과 합당한다는 얘기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세력에게는 경악할 만한 소식이었다. YS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일부 지지세력은 '야합'이라며 이탈했다. 대표적인 이가 훗날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이다. 노무현은 훗날 "3답 합당은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를 고착시킨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YS는 1990년 7월 민자당 대표가 되지만 최대계파인 '민정계'의 압박은 만만치 않았다.
적진 뛰어들어 문민정부 탄생시켜
민정계는 내각제 합의 비밀각서까지 공개하며 YS를 공격하지만 YS가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가버리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YS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며 사태를 수습했다. 내각제 포기, YS를 중심으로 한 정국운영 등 모든 상황은 반전됐다.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넘어야 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박철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박철언을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YS는 이를 좌절시켰다. 김윤환 등 민정계 인사를 끌어들이는 등 당을 장악한 뒤 그는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DJ, 그리고 정주영 후보와 격돌한다. 선거운동 기간에 YS 세력은 대구경북(TK) 세력과 만나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는데 이를 정주영 후보 측이 도청해 폭로했다.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 그러나 이는 오히려 YS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92년 12월18일 YS는 DJ를 193만표 차로 꺾고 대통령이 된다. 당선증을 들고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고 어머니 묘에 절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던 소년의 꿈이 이뤄지던 순간이다.
누적된 모순·악습을 제거하다
YS는 새 행정부를 문민정부라고 이름 짓고 한국 사회에 누적된 모순과 악습을 일거에 깨뜨리려는 듯이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1993년 2월 취임하자마자 하나회를 해체하고 군사정변의 싹을 잘랐다.
같은 달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전격 공개하더니 고위공직자들에게도 이를 요구했다. 5월에는 "문민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선언했다. 8월에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모든 개혁조치가 전광석화 같아 구세력은 저항할 시간조차 없었다. 지지율은 90%를 넘었다. 1994년에는 김문수·이재오 등 노동계 인사를 민자당에 영입했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격상
집권 3년차인 1995년 YS는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거대한 계획을 실행한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드러나면서 둘을 1996년 1월 구속했다. 국회를 통해 5·18특별법을 제정, 신군부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법정에 세웠다. YS는 노태우와의 관계를 끊고자 1995년 12월 5일 민자당을 해산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광주사태'로 불리던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격상시킨 것도 YS다.
이 시기 YS는 지방자치 제도를 확대한다. 1995년 7월 전격적으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치러졌다.
1996년말부터 시작된 시련
YS의 레임덕은 1996년 말 노동법 날치기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여당 의원들을 버스로 집합시켜 심야에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전국에서 노동법 개정에 저항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차남 김현철은 국정개입 소문이 끊이지 않다가 1997년 2월 구속되고 이즈음부터 한보철강·기아자동차 등 대기업이 연쇄 파산한다. 금융시장도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내렸고 YS정부는 퇴임을 몇 달 앞둔 시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
이회창은 신한국당에 단기필마로 들어와 순식간에 당을 장악해버린 뒤 YS에게 탈당을 요구한다. YS의 과거 영광은 모두 무색해졌다. 결국 필생의 라이벌인 DJ에게 대통령직을 넘기고 상도동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고 말했다.
퇴임 후에도 여전했던 입김
퇴임 이후 DJ와 노무현 대통령 세력이 '개혁세력'을 표방하면서 YS는 문민 보수정치의 상징이 됐다.
그는 퇴임 후에도 보수정치의 큰 어른으로 대우받으며 국내 정치에 대해서도 온갖 발언을 했다. 국민의정부 시절에는 "내가 대통령이 됐을 때 DJ는 내가 무서워 영국으로 도망친 뒤 은퇴를 번복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에는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됐다며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런 수위 높은 발언을 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대우를 받은 것은 그가 영남권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보수정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과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민주계는 현재도 새누리당 최대계파인 '비박계'로 이어지며 YS의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대표적 정치인이 다음 대통령을 꿈꾸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다.
신랄했던 YS의 인물평
"김구는 정치적 감각이 없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정치인이며 정치적 판단도 이승만을 못 따라간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다.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부정축재가 너무 심해서 내가 대통령이 되고 감옥에 넣었다. 기업인들로부터 수천억원의 부정한 재산을 모았고 무능과 부정의 극치."
"1971년 선거 무렵까지는 지역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DJ가 지역감정을 이용했다. 입만 벌리면 숨 쉬는 것을 제외하고 전부 거짓말."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다. 의리가 없다. 평가가치 없다."
/맹준호기자 next@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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