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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235> ‘위대한 주연배우’ 김영삼 서거에 부쳐

손명순 여사가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인생에서 저마다 하나씩의 역할을 맡았다고 이야기했다. 출연 분량이 많은 배우, 무대 노출 시간은 짧지만 극의 전개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배우, 당장은 필요 없어 보이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존재감을 발하는 배우 등 그 유형이 여러 가지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들은 상당히 많은 숙제를 안고 있는 배우들이다. 대중들 앞에서 노련하게 자신의 ‘대사’와 ‘연기’를 만들어 가야 함은 물론이요, 전체 극을 감상한 그들이 감동을 안아 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정치인은 스스로가 배우이자 제작자요, 연출의 역할을 해야만 하는 상당히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다. 반면에 직업을 그만두고 나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조금은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떤 배우’였을까. 최연소, 최다선 국회의원, 첫 번째 제명 의원 등 다양한 민주화 투쟁 과정의 이력이 있지만, 그런 기록만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위대함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그랜드 디자인(grdesign)’이라는 말이 탄생하게 한 원인을 제공한 배우였다. 남들이 명시적인 전략, 서로와의 지분 거래를 통해 정치라는 무대를 만들어 갈 때, 김영삼은 판을 엎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투사는 절대로 한 개인의 투쟁으로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김영삼은 대국(大局)을 읽고 타협할 수 없는 순간마다 자신만의 입지를 만들어 주변을 놀라게 할 줄 아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김영삼의 존재로 인해 우리 정치계의 수준이 제고되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는 이유다. 불의에 맞서 풍파(風波)를 과감하게 만들어 내는 정치인의 존재 때문에 그 과정을 중재해야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역할이 생겼다. 김영삼이 최고 리더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두터운 ‘인재 생태계’의 힘이 필요했다. 또 상대 진영의 입장에서는 김영삼과 대화하기 위해 그의 독특한 코드(code)를 이해하고 맞출 줄 아는 역할이 절실했다. 여러모로 정치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는, 김영삼의 존재는 보석과도 같았다.

재임 시에도 주연 배우로서의 역할은 계속됐다. 거침없는 말과 실행력 때문이다. 일본의 잇따른 망언에 대해서는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라고 응하거나, ‘개가 짖는다고 뒤를 돌아 볼 여유는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역사를 정리하는 그의 발언도 돋보였다. ‘분노와 저항의 시대는 갔으며, 투쟁이 영웅시되던 시대도 갔다’며 민주화 이후의 한국을 되돌아봤고, ‘올라갈 때는 반드시 내려올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멘트’의 달인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발언들이 말의 성찬으로만 그친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하나회 척결, 구 조선총독부 철거, 금융실명제 도입과 같은 굵직한 치적을 남기며 행동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전 국민이 정치평론가가 될 수밖에 없게 했던 단초를 제공한 이가 김영삼 전 대통령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치세(治世)에 크고 작은 위기가 왔다 갔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김 전 대통령의 책임도 없지 않다고 할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김영삼은 다른 이들이 지도자에게 보내는 따가운 시선, ‘판’ 자체의 본질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이겨나가는 힘 있는 배우였다는 사실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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