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리더십과 CEO<br>조선의 이노베이터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 어찰 통한 '소통의 정치'<br>하드& 소프트 파워 적절한 사용… 탕평책 통한 화합 배워야 할 덕목
![](http://newsimg.sednews.com/2009/05/27/1HVYUBKESK_2.jpg) |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위) 정조 어찰첩(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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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몇 년 새 출판, 뮤지컬, TV드라마 등 문화계의 화두가 됐던 ‘정조 신드롬’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정조어찰첩(御札帖ㆍ임금의 편지 모음)이 책으로 출간되면서 개혁군주 정조의 ‘서찰 정치’에 이목이 집중되는가 하면 지난 4월말 개관한 수원 화성박물관은 정조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화성박물관은 오는 6월 ‘정조의 비밀어찰에 나타난 정조의 정치운영’을 주제로 개관 기념 학술대회를 연다. 내년에는 정조학연구소를 개설해 화성의 문화와 정조의 사상을 세계화하는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
정조는 어린시절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했고 평생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 사후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살설이 제기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 자체로도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여기에다 규장각, 도화서를 활용해 18세기 문예부흥기를 이끌고 탕평책을 통해 포용 정치를 펼쳤으며 수원성 건축 등 과학기술 면에서도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대왕’의 면모를 갖춘 군주로 평가받는다. 정조는 또 김홍도, 박지원, 정약용, 박제가 등 당시 뛰어난 인물들의 활동을 뒷받침했던 지식경영자로서 끊임없이 학술물의 소재가 되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의 리더십은 인문의 숲에서 경영의 길을 찾으려는 경영자들 사이에서도 화제다. 500년 조선 역사에서 세종과 함께 대왕 칭호를 얻은 군주인 그에게는 개혁군주, 소통 경영자, 문예 경영자, 지식 경영자라는 말이 꼬리처럼 따라다닌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1,37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CEO로 가장 모시고 싶은 역사적 인물 유형’에서도 ‘정조대왕형’(22.4%)이 광개토대왕형(19.7%), 세종대왕형(15.5%)을 제치고 1위에 오른바 있다. 출판사 ‘해냄’의 이진숙 편집장은 “18세기 지식사회의 촉매역할을 했던 군주로 10여년 전부터 학계의 관심을 모아온 정조대왕은 최근 영화와 드라마, 서적을 통해 대중화됐고 이제는 한국형 리더십을 연구하는 경영자 및 학자들에게까지 주목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개혁 리더십
정조 임금은 노론 벽파 등 반대세력을 포용하고 관노비 철폐 등으로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개혁 군주’로 통한다. 2007년 대선 때는 정조의 개혁성향을 정치 슬로건에 이용해 자신을 21세기 정조라고 칭하는 후보가 등장하기도 했다. 개혁군주로서 정조가 새삼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의 전형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위기의 시대, 격변의 시대에서 변화를 이끌 리더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른 것이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정조는 조선의 이노베이터였다. 당면한 위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타개하는 능력이 탁월했다”며 “새롭게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제도를 다른 방식으로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규장각 역시 기존에 있던 기관이었으나 그는 규장각을 싱크탱크로 성장시켜 적절히 이용했다는 것.
‘이산 정조대왕-조선의 이노베이터’를 쓴 이상각 작가 역시 정조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조선 최초의 자립 위성도시로 수원 화성을 건설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정조는 수원을 통해 농업용수를 해결하고 농지를 확충하고 농산물의 자급자족을 실현했다”면서 “자신이 직접 만든 호위군대인 ‘장용영’의 주둔지이자 국가 비상사태 시 요충지, 지방 농산물을 서울에 유통시키는 상업도시의 역할까지 고려해 신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목표가 주어지면 분석ㆍ계획ㆍ실천의 삼박자를 정교하게 구사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고 말했다. 정조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 예술, 군사, 과학기술 등 국가적 역량이 총 집약된 건축물인 수원 화성은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21세기 문화유산 체험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손욱 농심 회장은 지난 2월 본사에서 진행된 정조실록학교에서 ‘조선의 혁신군주, 정조’를 주제로 강의할 정도로 정조 리더십에 관심이 많다. 삼성SDI 사장과 삼성종합기술원장을 지내며 ‘혁신 CEO’로 널리 알려진 손 회장이 정조에 주목하는 이유는 정조 시대와 지금의 사회가 유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그는 “이념체계가 복잡해지면서 갈등이 표출되고 백성을 움직이는 힘도 다양해진 시기였던 18세기 정조는 신도시 건설, 시장 자유화 및 공정거래 정착, 적극적인 인재양성 등을 통해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며 “지도자와 경영자는 역사에서 리더십을 배워야 하며 정조의 인재론과 소통 리더십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올 2월 ‘CEO, 역사에게 묻다’를 펴낸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코리아 부사장은 정조에게 위기관리능력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규장각을 싱크탱크로, 친위대 장용영을 군권 보호용으로 적극 활용했던 정조의 모습에서 ‘핵심 컨트롤타워 구축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다”며 “정조는 약한 정치적 기반과 붕당정치라는 위기 속에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적절히 활용한 리더”였다고 평가했다. 소프트파워가 규장각이었다면 하드파워는 친위부대였던 장용영이다. 김 부사장은 “오늘로 말하면 소프트파워가 핵심기획팀, 하드파워가 현장”이라며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겸비한 리더는 스스로 변화와 혁신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소통의 리더십
정조는 경연은 물론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제도를 통해 신하와 백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군주였다. 이상각 작가는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66차례의 행차를 통해 상언과 격쟁을 3,355건이나 처리했던 초능력자였다”고 표현했다.
올해 정조의 정적으로 알려진 노론 벽파의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들 중 297통을 번역해 ‘정조 어찰첩’으로 펴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역대 국왕들의 어찰을 수도 없이 봤지만 정조처럼 정적과 측근을 가리지 않고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 받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정조는 글을 통해 생각을 주고 받는 것 자체를 즐겼고 편지를 통해 묻고 지시하고 정보를 얻으며 소통의 리더십을 실현했다”고 평가했다.
정조는 어찰을 통해 사대부들의 여론뿐아니라 민심까지 살피며 소통했다. 또 상언과 격쟁을 통해 구중궁궐에서는 알 수 없는 지방정치의 실태를 살폈고 백성들의 하소연을 듣고 암행어사나 감찰을 파견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 현륭원 입구에서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길을 상언과 격쟁의 장소로 삼았다. 상언과 격쟁은 상소나 민원을 올리는 것으로 특히 격쟁은 임금의 근처에 이를 방법이 없는 백성들이 꽹과리를 울려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한 획기적인 민원 방법이었다.
한컴 대표 시절부터 매주 직원들과 이메일을 주고 받아 서한집만 3권을 출판한 정이만 한화 63시티ㆍ서울프라자호텔 대표는 ‘한 사람의 꿈은 꿈으로 남지만 만인의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정조의 서신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정조가 위대한 왕으로 추앙을 받는 것은 충분한 소통을 통해 저항을 극소화하면서 개혁을 추진한 데 있다”며 “‘혼자서 최고가 아닌 더불어 최고가 되자’는 좌우명을 갖고 정조의 소통 리더십을 본받으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정조의 탕평책도 한꺼풀만 뒤집어 보면 소통의 리더십이라 할수 있다. 탕평책에 근거한 인사 원칙을 통해 “오직 그 사람을 보아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사람을 버릴 것”이라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선왕 영조가 배척했거나 역모에 연루돼 있는 사람들까지 다시 불러들여 인재로 발탁하기도 했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하루는 임금에게 한 신하가 “궁궐 문을 지나다 보니 문지기가 보초를 서며 책을 읽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자 정조가 문지기를 불렀다. 문지기는 몸둘 바를 몰라 “공부가 하고 싶어 책을 읽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이에 정조는 벌을 내리기는커녕 그를 사병으로 편입시키고 월급을 받으며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라고 명을 내린다. 정조의 이 같은 생각은 당시 개성있고 독특한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배경이 됐다. 안 교수는 “이것이 바로 시대를 이끈 국왕의 리더십”이라며 “최근의 정조 열풍 속에 현 시대를 사는 리더들에게 대중이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 정조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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