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도 이제 끝물이다. 기후변화의 영향 탓인지 과거에 비해 여름 시즌이 길어졌다고 하나 지난주 말로 동해안 해수욕장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부산 해운대야 9월 초까지 운영한다지만 새벽녘 창 너머로 스며드는 기운이 제법 선선한 게 요즘 날씨다.
가을을 코앞에 두고 국제금융시장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중국 상하이 증시가 며칠 건너 주기적으로 폭락하고 아세안 주요 국가 증시와 통화 가치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곤두박질치고 있다. 급기야 9월 신흥국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설마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외신들은 "1997년 위기의 망령이 아시아를 사로잡고 있다"고 부채질을 해대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초여름까지 기세 좋게 오르던 코스피와 코스닥이 추락하더니 어느덧 박스권 하단을 꿰뚫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계 투자은행은 한국을 '위안화 절하의 취약국 10(troubled 10)'명단에 올렸다. 중국 의존도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페루와 콜롬비아 같은 중남미 이머징국가와 나란히 취급하는 데 불쾌감이 든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유독 9월과 10월에 위기론이 현실화했다. 저 멀리 1929년 대공황은 10월 뉴욕증시 폭락이 신호탄이었고 가까이는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붕괴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발전했다. 증시 대폭락의 대명사격인 블랙먼데이는 1987년 10월 뉴욕 증시 22% 폭락이 원조다. 왜 가을에 위기가 잦은지 과학적 규명은 어렵지만 워낙 잦으니 이번에도 혹시 그러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민 반응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전벨트는 단단히 매야 할 것이다. 지구촌 어느 한 곳이 터지면 위기는 도미노 쓰러지듯 빠른 속도로 전염되는 게 그간의 경험이다. 1997년 태국의 밧화 붕괴는 IMF 외환위기로 이어졌고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역시 그랬다.
국제 금융시장 난기류의 진원지는 중국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시기와도 맞물리면서 증폭 효과가 난 것이다. 환율이라는 최후의 정책수단까지 동원하고 주기적 증시 폭락은 중국 경제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중국은 특유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미국에 견줄 만한 경제 볼륨을 키웠다. 하지만 최근 부양 처방의 약발이 듣지 않는 것을 보면 이제는 시장의 힘이 정부 통제력을 넘어설 정도로 커졌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가진다.
돌이켜보면 우리 경제에 위기와 고비는 늘 있었다. IMF 외환위기 때보다 경제가 더 어렵다는 하소연은 일상화했다. 그래도 파국적 외환위기를 신속히 극복했고 미국발 금융위기도 잘 대처했다. 눈에 보이고 예측 가능한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과 중국 경제의 경착륙, 심지어 그로 인한 이머징마켓 디폴트 위기가 발생해도 충격은 있겠지만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해외로 쏟아내야 할 정도로 충분한 보유 외환과 낮은 단기외채 비율은 든든한 방화벽이 될 것이다. 선진국에 비해 양호한 재정 여력, 상대적으로 높은 기준금리 수준은 비상시 활용 가능한 정책 수단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위기가 아니다. 우리 경제는 젖 먹던 힘을 다 쏟아부어도 3% 성장조차 간당간당하다. 성장의 기초 체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구조적 한계에 봉착했다는 위기론은 그래서 나온다. 구조적 위기를 부른 요인은 꼭 집기는 어렵다. 정치권 몰염치와 후진성, 정책 결정의 불투명성, 경직된 노동시장, 공교육 붕괴, 가계 부채에 이르기까지 잠재성장률을 갉아먹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책임소재마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잠재성장률은 10년마다 반 토막 났건만 역대 어느 정부의 책임인지 모호하다.
위기 뒤에는 기회가 온다고 하지만 현재 진행형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해도 도약의 기회를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 미래 위기를 종합적으로 대응할 조직도 역량도 노하우도 없다. 미래의 일이니 현재의 결정권자가 책임질 일도 없다. 구조적 위기를 여태껏 키운 연유다.
/권구찬 경제부장 chans@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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