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먼지도 그것 색깔 바꾸지 못해' 기형도 시 읽고 영화 해야겠다고 결심
드라마 찍으며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혹한으로 촬영 접을땐 무섭더라구요
관객 300만 돌파 흥행에도 잇단 혹평 "길게 보자" 생각하며 위안 삼아 나이들면 연극 제대로 해보고 싶어
소년에게 극장은 놀이터요, 천국이었다. 큰아버지가 일하던 서울 신설동의 한 극장. 소년은 영사기 도는 소리를 따라 콧노래를 불렀고 상영관 커튼 뒤에 숨어 낯 뜨거운 성인영화도 훔쳐봤다. 그것이 재미였고 행복이었다. 극장을 휘젓고 다니던 어느 날 운명적인 환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구니스'를 보게 된 것. 변두리 동네 아이들이 보물지도를 들고 악당들에 맞서 싸우는 모험 이야기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해리포터가 등장했을 때 전세계 초등학생들이 받은 충격이 이와 같았을까. 영화 장면을 떠올릴 때면 심장이 두근거렸고 며칠째 잠도 오지 않았다. 신선한 충격을 맛본 소년은 어느 날 밤 일기장을 펼치고 소원을 써내려간다. "어른이 되면 구니스 같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30년 뒤 소년의 간절한 소원은 이뤄졌다. 일기장의 주인은 300만관객을 돌파한 영화 '역린'의 이재규(사진) 감독. 다모, 패션70s, 베토벤 바이러스, 더킹 투하츠 등 드라마를 잇따라 히트시킨 스타 드라마 PD에서 '충무로의 신인'으로 데뷔에 성공한 이 감독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를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속의 간절함은 가득했다. 20년 가까이 비슷한 듯 다른 일(드라마)을 하며 마음 한구석에 키워왔던 꿈을 뒤늦게나마 이뤘기 때문이다. 그것도 '관객 300만명 돌파'라는 흥행과 함께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하고 싶었지만 이래저래 현실과 타협을 했어요. 대학도 연극영화과가 아닌 신문학과에 진학했고 대학 졸업 후엔 8년 연애한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방송국에 입사했죠. 드라마에 미쳐 지내다 보니 어느덧 18년이 지났네요."
◇'기형도의 시(詩)'가 깨우쳐준 어린 시절의 꿈=드라마 촬영으로 정신없던 어느 날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어린 시절의 소원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2008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촬영으로 한창 바쁜 때였다. 당시 이 감독은 드라마 시놉시스 앞에 기형도의 시(詩)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를 붙여놓았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중략)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다양한 군상이 지친 채 살아다가 잊었던 꿈을 찾아간다는 드라마 내용과 맞닿아 있는 시였는데 읽다 보니 제 인생에도 깨우침을 주더군요. 그때 더 늦기 전에 영화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죠." 틈틈이 써온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200억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해 당장 영화화하기는 어려웠다. 여러 시나리오를 검토하던 중 최낙권 초이스컷픽쳐스 대표가 건넨 시놉시스를 보고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최성현 작가의 '역린'이었다. 이 감독은 "드라마든 영화든 감정의 과잉상태인 작품이 많은데 최 작가의 시나리오는 절제된 감정을 담고 있으면서 여운을 주는 매력이 있었다"며 "물론 시나리오에 맞춰 감정을 억누르고 절제된 장면을 만들어내는 게 부담이었지만 그 덕에 정적이면서도 무게감 있는 작품이 나왔다"고 말했다.
◇베테랑 PD에서 신인 감독으로-익숙한 고생에도 멘붕=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을 베테랑 PD지만 신인 감독에게는 모든 상황이 새로웠다. 수차례 겪었던 추위도 수십 배 고통스러운 압박으로 다가왔다. "물리적으로 촬영할 수 없는 혹한이었어요. 대형 크레인 5대가 와 있고 배우와 스태프 150여명이 대기 중인데 장비는 꽁꽁 얼어 작동도 안 하고…. 한 컷도 못 찍고 촬영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서 정말 괴롭고 무섭기까지 하더라고요. 영화는 드라마보다 예산 압박이 더 철저하단 말이에요(웃음)." 베테랑 드라마 PD 때는 본인이 직접 카메오로 등장하는 여유도 보였지만 모든 게 처음인 이번 영화에서 출연은 꿈도 못 꿨다. 아니 생각조차 못했다.
◇300만 돌파 VS 악평, "관점의 차이" 위안 삼아=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내놓은 데뷔작. 흥행성적은 달콤했지만 신인 같지 않은 신인 감독의 작품에는 맵고 쓴 평가도 이어졌다. '16부작 드라마를 압축해놓은 영화' '산만한 드라마 화법' '향기 없는 꽃'…. 멀티캐스팅 속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배역들이 범람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 감독은 "신인 감독으로 원점에서 시작하는 것이기에 서운한 건 없다"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친 일부 평가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정조(현빈)와 갑수(정재영), 을수(조정석) 모두 도구화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던 중 이들 모두 본인의 의지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갑수와 을수의 희생으로 정조가 주도적인 본인의 인생을 살게 되죠. 정조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갑수와 을수가 꼭 필요한 건데 이걸 두고 산만한 진행이라고만 평가하니 서글프더라고요. 드라마만 20년 가까이 한 저도 모를 '드라마 화법'에 대한 이야기도 답답하고." '관점의 차이가 있으니 길게 보자'고 생각을 고쳐먹자 위안이 되고 마음이 편해졌다. 영화가 손익분기점인 320만명을 돌파하면서 '적지 않은 관객들이 우리가 표현하려 했던 부분을 감성·이성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힘도 얻었다.
◇드라마·영화·연극 모두 더 하고 싶어=10년 넘게 드라마를 찍었고 그토록 바라던 영화도 만들었다. 2010년 노희경 작가와 손잡고 연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 감독은 "연극은 제대로 수습 안 됐고 영화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문제"라며 겸손함을 보였다. 겉은 겸손함이지만 '더 해봐야겠다'는 욕심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좀 더 연극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려보고 싶어요. 현실과 게임의 이중세계를 그린 소설 '팔란티어'를 원작으로 한 영화 차기작도 준비하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한두 작품을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드라마도 더 해야 하고…. 4~5편의 작품을 하면 PD·감독으로서의 활동도 끝나지 않을까요(웃음)."
◇'열등하기에 애쓰는 인간'으로 기억됐으면=여러 번의 도전을 통해 그가 얻은 교훈(?)은 놀랍게도 '열등감'이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겪으면서 본인 스스로가 얼마나 얄팍하고 열등한 인간인지를 알게 됐다는 것. 그런 깨달음을 통해 다음 작품을 만날 때면 한층 발전하게 된다는 게 이 감독의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열등하기 때문에 부단히 애쓰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배우 김명민씨가 연기대상을 받았을 때 '이렇게 연기를 잘할 수 없게 태어나게 해주신 신께 감사한다'고 소감을 말했어요. 스필버그 감독도 매일 아침 면도를 하며 '내 경쟁자는 유명한 거장 감독들이 아닌,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니는 젊은이들'이라고 되뇐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 모두 연기와 연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저도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그런 누군가가 되고 싶어요."
차기작도, 인간적인 목표도 중요하지만 이 감독이 당장 세워야 할 것은 다음주 가족여행 계획이다. 반나절 이어진 언론인터뷰에 피로를 토해내던 눈동자도 '다음주'라는 단어가 나오니 총명해진다. "가족끼리 오랜만에 지리산 여행을 가기로 했어요. 저도 아이들도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영화 데뷔를 묵묵히 응원해준 아내, 미술을 좋아하는 중3 딸, 아빠처럼 감독이 되고 싶다는 중1 아들과 모처럼 갖는 휴식이다. "영화 개봉 후 공격적인 글들에 아이들도 상처를 받았을 텐데 내색을 하지 않더라고요. 아빠가 하는 일, 작품에 자부심을 가져주니 고마울 따름이죠." 영화에 대한 열망으로 똘똘 뭉친, '열등감은 나의 힘'을 외치는 심오한 이 감독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가족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에 부푼 평범한 가장이었다.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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