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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3월2일] 중·소 국경분쟁

매복 중인 중국군에게 소련군 순찰대가 걸려들었다. 첫 교전에서 희생된 소련군 전사자만 30여명. 1969년 3월2일 우수리(헤이룽ㆍ黑龍)강 전바다오(珍寶島ㆍ러시아명 다만스키섬)에서 일어난 일이다. 복수를 다짐한 소련은 보름 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중국은 소련 기갑부대의 상대가 못됐다. 중국군 800여명, 소련군 6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지루한 소강상태 끝에 같은 해 8월 ‘현상유지’라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다. 무력충돌은 예고된 것이었다. 1950년대 중소 밀월관계 속에서 중국은 청나라 말기 맺어진 불평등 국경조약의 재협상을 요구했다. 레닌과 소련정부가 1920년 약속한 ‘제정 러시아가 불평등 조약으로 탈취한 영토를 중국에 영원히 무상 반환한다’는 근거도 내밀었다. 소련의 묵묵부답 속에 관계가 뒤틀어졌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와 미국과의 데탕트는 중소 이념분쟁으로 이어졌다. 소련은 중국ㆍ인도 국경 분쟁시 인도에 무기를 공급해 중국을 격분시켰다. 중국이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을 무력 진압한 소련을 ‘사회제국주의’라고 비난하자 소련은 ‘중국 공산당은 교조주의자 집단’이라며 맞받아쳤다. 쌓이고 쌓인 감정이 폭발한 중소 국경분쟁은 무승부로 봉합됐지만 세계사의 흐름을 갈랐다. 소련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무력했다는 중국의 반성은 1972년 미중 상하이 공동성명을 낳았다. 미국의 대소 봉쇄전략의 한 축을 떠맡은 중국은 서방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여 경제개발에 매진했다. 북한이 주체사상의 기치를 든 것도 이때부터다. 중소 국경분쟁은 더 이상 없다. 러시아 정부는 2001년 중국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줬다. 중국의 대규모 대러 투자가 따랐다. 칼과 이념이 넘지 못한 숙원을 돈의 힘이 푼 셈이다./권홍우ㆍ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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