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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9월3일] <1181> 우스터 전투


1651년 9월3일 잉글랜드 서북부 우스터(Worcester). 기병대를 앞세운 의회군 1만여명이 왕당파 군대를 향해 달려나갔다. 내전 격화로 아버지 찰스 1세가 참수형을 당한 뒤 스코틀랜드로 피신,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찰스 2세는 승리를 장담했다. 이권을 약속해 용감하기로 소문난 스코틀랜드 병사들을 물론 유럽 대륙의 용병까지 1만6,000여명의 군대를 끌고 왔기 때문이다. 결과는 찰스 2세의 기대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정면뿐 아니라 측면과 후방에서도 의회군이 쳐들어왔다. 의회군 총병력은 3만1,000여명. 국왕군의 2배에 가까웠다. 군편제를 대폭 개선해 철기병 또는 신형군으로 불렸던 의회군은 장비에서도 국왕군을 압도했다. 사기도 높았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봉급을 받은 군대라고 평가될 만큼 대우가 좋았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종결된 전투에서 국왕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전사자 3,000여명에 포로 1만명. 반면 의회군 사상자는 200명에 그쳤다. 완벽한 승리는 1642년부터 시작된 영국내전을 종식시켰다. 우스터 전투는 식민지의 인력난 완화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도 낳았다. 스코틀랜드 포로 8,000명이 일정 기간 종료 후 자유민으로 풀려나는 계약노예 신분으로 뉴잉글랜드 등지에 보내졌으니까. 찰스 2세는 가까스로 프랑스로 도망쳐 의회군을 지휘했던 크롬웰이 사망한 뒤 왕정복고(1660년)까지 망명의 세월을 보냈다. 영국이 9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빠진 이유는 크게 세 가지. 국왕이 관직매매와 독점사업권으로 권력을 강화하는 봉건적 관습으로 되돌아간데다 한시적 세금인 건함세의 확대, 대주교를 앞세운 종교의식 강요가 겹쳐 반란을 불렀다. 온당치 못한 조세정책과 인사ㆍ정책에 대한 불만, 종교적 편향성이 화를 자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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