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 1월22일, 스위스 용병 150여명이 로마로 들어왔다. 723㎞ 행군 끝에 도착한 용병들은 바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경호 업무를 맡았다.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의 502년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다. ‘잘 사는 나라, 스위스’의 용병이라니! 가당치 않은 것 같지만 예전에는 그랬다. 척박한 땅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에 용병만한 돈벌이 수단도 없었다. 각국은 스위스 용병을 반겼다.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독립전쟁에서 다져진 전투력은 물론 계약에 대한 충성도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교황의 스위스 용병은 21년 뒤인 1527년 발생한 ‘로마 약탈(Sacco di Rome)’의 순간에서 이름값을 해냈다. 국운이 융성하던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가 교황 클리멘스 7세와 프랑스 연합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로마는 8일 동안 약탈 당하며 완전히 짓밟혔으나 스위스 용병대만큼은 명예와 명성을 드높였다. 교황의 군대가 완전 항복한 상황에서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 교황을 안전지대로 피신시킨 것. 교황청 근위대를 스위스군 전역자로만 뽑는 전통이 이때 생겼다. 당대 최고 재산가였던 메디치 가문 출신인 교황은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스위스 용병들을 각별히 챙겼다. 근위대로 격상시키고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군복에 메디치가의 상징 색상인 노랑과 파랑색을 입힌 것도 가문의 일원으로 우대한다는 애정의 표시였다. 요즘도 스위스 근위대는 보초병뿐 아니라 교황의 근접 경호까지 맡는다. 병력이라야 110명에 불과한 스위스 근위대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군대다. 신참의 월급이 1,350유로(186만원)라는 점이 그렇고 휴일이면 10만여명의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달러 박스라는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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