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되면 세한도가 좋아지고 여백의 미가 다가올 때지만 나 자신으로는 여백의 본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충만ㆍ관능 이런 것에 물들고 싶은 것이 요즘 내 생각입니다.” 고은(75ㆍ사진) 시인이 등단 50년을 기념하면서 시집 ‘허공(창비 펴냄)’과 지난 여름 처음 그린 그림을 선보인다. 그는 시에 대해 “아이를 낳아 교육 없이 사회로 내보내는 심정으로 쓴 것”이라며 “윤리의 문법을 덧씌우지 않고 알아서 살아보라고 보냈다”고 설명했다. 캔버스를 가득 메운 그의 작품들은 화려하면서도 감각적이다. 지난 8월 한여름 단 17일 동안 그렸다는 작품은 모두 50여점으로 100호부터 30호까지 다양한 크기이며 붓글씨ㆍ병풍 등도 포함됐다. 웬만한 전업 작가들의 전시작품보다 많다. 박고섭ㆍ천경자ㆍ변종화 등 예술가들의 평전은 쓴 적이 있지만 직접 그린 것은 처음이라는 그는 “평생 고이 간직해온 그리기에 대한 열망을 우연한 기회에 발전시켰다”며 “예전에는 시가 떠올랐는데 요즘은 눈을 감으면 그림이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다. 400여편에 이르는 연작시편 ‘만인보’ 작업,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 그리고 그림에 이르기까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발한 창작 에너지는 신명에서 나온 것. 그는 “한국의 근본적인 감성은 한(恨)이라고 하는데 한과 맞닿은 것이 흥이고 흥의 원소가 바로 신명”이라며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한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 지어낸 말이고 한국은 원래 시끄러운 곳”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흥과 시끄러움이 묘하게 연결돼 있는 원소가 바로 신명인데 내게는 그 신명의 소음성이 있다”며 “진리는 주관적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생을 시시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의 첫 그림과 글씨전 ‘동사를 그리다’는 오는 4일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12일까지 열린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