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으로 인한 신흥국 위기가 구체화되고 있다. 테이퍼링에 따른 신흥국 자금이탈 가능성을 넘어 외환사정이 취약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터키·브라질·인도·인도네시아·헝가리·칠레·폴란드 등 8개 국가는 앞으로 1~2년 안에 외환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단기외채 규모와 경상수지 적자 추세를 감안할 때 1~2년 안에 보유외환이 바닥난다는 것이다.
실제 이들 벼랑 끝 8개국의 금융시장은 최근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달러 대비 남아공 랜드화 가치는 15일 기준으로 연초 대비 3.5%나 하락해 가장 큰 폭의 내림세를 나타냈다. 터키 리라화 화폐가치가 달러 대비 2.7% 하락했고 헝가리 2.1%, 칠레 1.7%, 폴란드가 1.2% 각각 떨어졌다.
◇급증한 단기부채가 뇌관=파이낸셜타임스(FT)는 16일(현지시간) 자산운용사인 슈로더와 공동으로 분석한 결과 지난해 하반기 기준으로 터키·남아공·칠레·인도·인도네시아의 경우 앞으로 1년간 단기외채와 경상적자를 메울 수 있는 외환만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헝가리와 브라질·폴란드는 2년 정도 버틸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당초 시장에서는 경상적자와 재정적자를 기준으로 인도·인도네시아·터키·브라질·남아공 등을 테이퍼링 '5대 취약국(Fragile Five)'으로 분류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단기외채라는 분석 틀을 추가하자 헝가리·칠레·폴란드 등을 더한 '벼랑 끝 8개국(Edgy Eight)'이 위기조짐 국가로 분류됐다는 것이다.
슈로더의 크레이그 보덤 신흥시장 이코노미스트는 "시장의 초점은 이제 외부자금 의존도가 큰 국가, 특히 단기부채 상환 부담이 큰 국가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신흥국으로의 자금유입 중단이나 유출 등 '갑작스러운 정지(sudden stop)'가 발생한다면 부채가 많은 기업이 쓰러지면서 은행권도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FT는 또 이들 8개국 외에도 우크라이나·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 등 3개국도 테이퍼링 위험에 노출된 국가로 분류했다. 다만 이들 국가는 테이퍼링 자체보다는 국내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더 문제라고 FT는 지적했다.
◇신흥국 유입자금 80% 급감 가능성도=미 연준이 테이퍼링 속도를 높일 경우 글로벌 자금 엑소더스(대탈출)로 신흥국이 경제위기를 겪을 것이라는 우려도 잇따르고 있다. 세계은행은 전날 공개한 연례 세계경제보고서에서 "기본적으로 신흥국에서의 자금유출 속도도 완만할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미 연준 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지면 불과 몇 달 만에 미 10년물 국채금리가 최대 2%포인트 뛸 것"이라고 밝혔다. 보고서는 미 10년물 국채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신흥국 자금이 평균 30% 줄고 2%포인트 뛰면 감소율이 45%로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특히 보고서는 "최악의 경우 신흥국 유입자금은 80%나 줄고 성장률도 평균 0.6%포인트 하락할 것"이라며 "신흥국의 25% 정도는 글로벌 자본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히면서 금융위기를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경상적자가 심각한 남아공·터키·우크라이나·인도·인도네시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등이 충격이 클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 지난해 5월 출구전략 가능성을 처음으로 시사하자 미 국채 10년물 수익률이 1% 급등하며 같은 해 6~8월에만 신흥국에서 640억달러가 빠져나갔다. 세계은행의 앤드루 번스 글로벌 거시경제 담당은 "지난해 혼란은 신흥국 시장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경고음"이라고 설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9~2013년 신흥국 유입자금 가운데 60%는 은행대출이나 외국인직접투자(FDI) 형태가 아닌 채권·주식 등 자산투자였던 것으로 집계됐다. 선진국 금리가 오르면 순식간에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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