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이슈 인사이드] 반칙이 통하는 집단주의가 커넥션 키운다

끼리끼리 문화가 낳은 사생아 '돈봉투'<br>"발각 되더라도 감쌀 것" 믿음 커 책임 회피·부정 합리화 관행<br>"합리적 시스템 부재 반증" 음성적 거래 방식 적발 힘들고<br>대가성 입증 못해 기소유예 일쑤 사회 전반서 의식 개혁 이뤄져야




"발전기금은 법에 걸리는 거 아니야, 안 그렇습니까 장 형사님?"

청각장애인학교의 교장실에 형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다. 머리가 벗겨진 교장은 태연한 척 골프공을 굴리며 "장 형사가 우리 애들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덕담을 건넨다. 형사의 손에는 어느 새 두툼한 흰 봉투가 쥐어져 있다. 슬쩍 봉투를 부풀려 보니 '배추 이파리'가 수북하다. 그 순간, 이 학교에 갓 부임해 온 젊은 교사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난해 가을 개봉해 5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낳은 영화 '도가니'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교사는 학교의 부정과 비리가 형사가 쥔 돈 봉투에 의해 은폐되고 있음을 직감한다.

정치권의 돈 봉투 살포와 관련한 고승덕 한나라당의 의원의 폭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국회의장의 전 비서관에 이어 전당대회 당시의 캠프 인사들까지 줄줄이 소환되면서 검찰 수사의 전방위적 확산과 함께 이 사건의 파문도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촌지ㆍ뇌물 등으로 대변되는 돈봉투 문화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집단과 계층을 막론하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돈봉투는 지금도 오가고 있다. 고 의원의 폭로는 빙산의 일각을 수면 위로 드러낸 사건일 뿐이다.

영화 도가니의 영문 제목은 'silenced'다. 고 의원의 입에서 시작된 이번 돈봉투 사건은 뿌리 깊이 박힌 뇌물 문화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한 바탕 소동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예의 그 침묵과 은폐로 돌아갈 것인지를 우리 사회에 묻고 있다. 빙산의 일각만 드러냈을 뿐인 이번 사건의 끝맺음이 중요한 이유다.

대가와 보상을 바라고 고액의 현금이나 선물을 건네는 뇌물 문화가 마치 온 몸에 퍼진 암세포처럼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집단주의·온정주의 등 한국 특유의 문화가 나쁜 방식으로 변질된 사례가 바로 돈봉투라고 입을 모은다. 돈봉투는 무리를 지어 몰려 다니기 좋아하는 '끼리끼리 문화'가 낳은 사생아라는 것이다.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개개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아가 아닌 준거 집단에서 찾는 집단주의로 똘똘 뭉친 곳이 바로 한국 사회"라며 "부정적 행위를 저지르더라도 집단을 바라보며 책임감을 회피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뇌물을 건네는 사람은 집단 내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 여기고, 혹시 발각되더라도 집단이 자신을 감싸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서 교수는 "집단에 의존하는 유아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돈 봉투 문화를 뿌리째 뽑는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성경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돈을 받는 사람 역시 찝찝함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거절할 경우 상대방이 느낄 수치심 때문에 그냥 받고 마는 것"이라며 "이런 집단주의적 배경과 맥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쉬쉬하며 룰을 깨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도 "이 모든 것이 합리적 시스템에 의해 우리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방증이고 정상적인 사회로의 발전을 가로막는 위험한 관행"이라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범죄와 달리 교묘하게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악질적인 관습"이라고 개탄했다.

돈봉투의 효력을 믿는 사람으로부터 다른 이가 뇌물을 건네 받는 순간 일정한 대가와 보상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사돈통'이라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다음은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박모(26) 교사가 전하는 이야기다.

"몇 년 전 전교에서 1~2등을 다투는 학생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동료 미술 교사 A를 찾아왔다. A는 그 학생의 담임도 아니었다. 아들이 교과 성적은 다 우수한데 유독 미술 실기가 약해 손해를 본다고 어머니는 하소연했다. 상품권과 화장품 세트를 건네며'실기 점수 정도는 선생님 재량으로 충분히 조절해 줄 수 있지 않냐'는 말도 은근슬쩍 덧붙였다. 이후 학생은 실기 시험이 있을 때마다 만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구차한 설명 없이도 이렇게 돈과 선물 만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현택수 교수는 "고승덕 의원처럼 거절을 하면 '그래 봤자 효과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며 "돈을 받는 순간 효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과 압박을 받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문제는 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음성적인 곳에서 워낙 은밀한 방식으로 이뤄지다 보니 이를 적발해 법적으로 처벌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는 점이다. 공직자나 공무원, 교사 등이 뇌물이나 촌지를 받을 경우 액수와 상관 없이 대가성만 입증이 되면 현행법으로 처벌이 가능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사정당국이 증거를 포착하고도 대가성을 입증하지 못해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지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다.

정치자금법, 뇌물수수죄 등 현행법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는 한편으로 시민의 의식 개혁이 뒤따라 주지 않는다면 돈봉투 문화의 근절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김수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권이든 공직 사회든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금품수수의 해묵은 관행은 사회 전반의 의식을 탈바꿈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경 마켓시그널

헬로홈즈

미미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