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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법원 설치해 사건 부담 줄여야"

대법원 한해 사건처리 3만6,000건… 전원합의체 활성화 가로막아

사실관계 판단 업무에 시달려

법령해석·중요사건 심리 등 정책법원 기능 제대로 수행 못해

일반 상고사건과 이원화 필요

양승태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들로 구성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 대한 선고를 내리고 있다. /사진제공=대법원

지난 2011년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한 이후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해왔다. 최고 법원의 위상에 걸맞는 '대법 다운 판결'을 많이 내리기 위해서다.

실제로 양 대법원장 취임 전 10여건에 불과했던 전원합의체 사건 수는 취임 이후 20건 이상으로 늘었다. 1~2건에 불과하던 전원합의체 공개 변론도 지난해 4차례나 열렸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법관들이 한 해 3만 건이 넘는 사건에 파묻혀 지내면서 전원합의체 판결을 기대만큼 못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반 상고사건을 전담으로 처리하는 상고법원 설치를 추진하는 이유다.

대법관이 업무에 시달리는 건 숙명이라는 분위기지만, 대법관 1명이 1년에 수천건의 사건을 다루느라 정책 법원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최종심 역할을 하는 대법원은 국민들의 억울한 점을 풀어주는 권리구제 기능 역할도 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법령 해석의 통일을 통한 법적 가치와 기준을 제시하는 법률심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다수 의견이다.

사실 관계는 1·2심에서 다투도록 하고 대법원에서는 상고 사건 중 법령해석 적용이 잘못된 경우를 판단하고 국가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심리와 판단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관에 대한 사건 부담이 커지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깊이 있게 검토, 연구하고 사색할 여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러다 보니 중요한 가치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사건이 있어도 근원적 가치에 접근하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분쟁만 해결해 나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

대법원은 중요한 가치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면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법원행정처장 제외)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친 뒤 전원합의체에서 판결을 내린다.

여성에게 종중 구성원의 자격을 인정하거나 성전환자에 성별정정을 허가하고, 연명 치료 중단을 인정한 판결은 모두 전원합의체에서 나왔다.

이는 모두 국민의 실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판결로 전원합의체가 아닌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小部)에서 판단하기에는 사회적 파장이 너무나 큰 판결이었다.

양 대법원장 취임 이후 사건 부담의 증가 속에서도 전원합의체를 통한 법리선언 기능을 강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2010년 11건에 머물렀던 전원합의체 사건 수는 이듬해 28건, 지난해 22건으로 2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대법원에 접수되는 사건이 해마다 증가하는 상황에서 전원합의체를 더욱 활성화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른다.

대법관이 1년에 처리해야 하는 사건 수는 3,000건을 웃돈다. 지난해 대법원이 처리한 사건은 모두 3만6,000건으로 2002년 1만8,000건의 2배 수준으로 늘어났다.

상고심 사건 대부분은 법원의 법률적 판단을 문제로 삼는 대신 사실관계를 다시 판단해 달라고 요구하는 상고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지난 2002년 이후 10년간 상고기각률은 93∼95%에 이른다. 반면 사건을 다시 판단하라며 하급 법원으로 돌려보내는 파기율은 5∼7%에 불과하다.



대법원 관계자는 "상고 사건 수가 너무 많다 보니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에서 토론을 거쳐 판결을 내리고 싶은 사건이 있어도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최근 대법원이 '상고법원'이라는 카드를 제시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대법원의 사건 수를 줄이고 정책 법원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과거에도 법조계 안팎에서 이어졌다. 대안으로는 상고허가제를 실시하거나 대법관 증원 등을 통해 사건 부담을 줄이자는 방안이 언급되기도 했다.

대법원도 사건 수를 가장 확실히 줄일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은 상고허가제 재도입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상고허가제는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시행된 적이 있었다. 당시 여론수렴 없이 군사정권에 의해 도입됐다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거부감과 상고심 재판을 받을 기회를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비판에 밀려 시행 10년만에 폐지됐다.

상고법원 설치가 단순히 대법원의 사건 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전원합의체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대법관 증원 역시 대법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안이다.

대법원에 대법관이 아닌 법관을 배치하고 대법관과 함께 재판부를 구성해 상고심 사건을 담당하도록 하는 이원적 구성 방안도 있지만 대법관과 대법원 판사 사이의 합의 과정의 문제점 등으로 상고사건의 처리가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의 최고법원 기능을 살리면서도 국민들이 원하는 상고심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절충안은 상고법원안이 거의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상고법원이 설치되면 3심제를 유지하면서도 상고법원이 일반 상고 사건을 처리하고 대법원은 법령 해석이 필요한 사건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상고 사건을 처리하게 된다.

대법원이 일단 상고심 법원의 설치를 추진하고 나섰지만 현실에 적용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먼저 상고 사건을 나누는 기준 설정과 관련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또 상고법원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기존 민사·형사·행정소송법과 각급 법원 설치법, 상고심 절차 특례법, 법원조직법 등 각종 법령을 제·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고법원 설치가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충실히 살피자는 게 목적인 만큼 상고법원안이 최종 확정되기까지는 법조계 안팎의 의견을 수렴하는 작업이 좀 더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법원 내부 통신망을 통해 법관과 법원공무원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하고 있으며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 듣고 있다"며 "이러한 의견을 잘 검토해 합리적인 방안이 마련되면 공청회를 열어 설명하고 각종 의견을 종합해 연내에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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