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1월18일, 중국이 새파랗게 질렸다. 일본이 21개 조항의 요구를 해왔기 때문이다. 골자는 ▦산둥성 철도ㆍ광산의 이권 인정 ▦만주 조차지 설정 ▦섬과 항구의 이용권 인정 ▦재정과 경찰 업무에 대한 일본인 고문 영입 등이었다. 사실상의 반식민지화 요구였다. 중국은 분노했지만 대응할 방안이 없었다. 1차 대전의 와중에 칭다오(靑島)를 점령하는 등 중국 내 독일 이권을 차지한 일본을 당해낼 힘이 없었던데다 황제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던 위안스카이 총통이 일본을 지지기반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탓이다. 유럽이 전쟁에 빠진 틈을 이용한 일본의 요구는 4개월 뒤 문구수정 없이 받아들여졌다. 일본인 고문 영입건만 빠졌을 뿐이다. 중국인들은 21개 요구를 수용한 중일협약일(5월9일)을 국치일로 여기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1차 대전의 뒤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1919년)에서 협약 무효를 주장한 중국대표단의 건의가 묵살된 뒤 중국인들은 5ㆍ4운동 같은 대규모 항일운동을 벌였다. 결국 아시아 지역의 전후 처리를 위해 1922년 열린 워싱턴회의에서 중국은 중일협약 파기를 국제적으로 공인 받고 21개조 요구도 무효화시켰다. 이번에는 일본의 극우세력이 반발하고 나섰다. 일부 군인과 극우 민간인들이 주도하는 쿠데타와 정부요인 암살이 잇따라 발생한 끝에 현역군인들이 정치를 장악하는 군국주의와 국가사회주의로 빠져든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차례로 일으켰다. 간도와 만주 지역에 대한 한민족의 영토권도 21개조 요구를 계기로 완전히 중국에 넘어갔다.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조선은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동북아 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과거와 닮은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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