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맥없이 물러날 줄로만 알았던 정 총리가 최소한의 책무 이상을 수행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마치 잠자던 숲 속의 공주가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3일 국무회의는 정 총리가 취임 전 보여줬던 소신형 학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휴일까지 반납하며 야근하는 공무원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바쁜 머리에서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는 정 총리의 말에 과천의 한 공무원은 "우리 정부의 근본적 한계를 정확히 찔렀다"고 토로했다. 국제금융과 국내금융부처가 분리돼 있는 데 대한 문제제기는 경제관료 모두가 공감하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던 금기시된 비판이었다. 상근 과학기술 수석과 관련부처가 필요하다는 말은 이명박 정부 구성 당시 '작은 정부' 이슈에만 매몰된 나머지 국가의 먹을거리를 포기했다는 점에 대한 쓴소리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를 정 총리가 재임 시절에는 몰랐다가 떠날 때가 되니까 불현듯 깨닫게 된 것일까. 서울대 총장까지 역임한 경제학자 출신인 그가 이들 문제를 몰랐다면 경제학자로서 자질이 없는 것이고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면 그동안 '곡학아세'를 한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가장 큰 책임은 정 총리 자신에게 있다. 이 정도로 건전한 문제의식을 가진 그가 '세종시 특임총리'로 추락한 것은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정 총리 자신은 "현 정부의 지나친 보수화를 막았다고 자부한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기자 눈에 특임총리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 흔적은 전혀 띄지 않았다. 정 총리 스스로 선택한 정치인의 길이었지만 단 한번도 스스로의 이슈를 만들어 내부의 반대와 야당의 태클을 뚫고 자신의 색깔을 관철시킬 만한 의지와 뚝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 총리가 마지막으로 쏟아낸 입바른 소리에 만시지탄을 느낀다. 또 그의 사퇴가 아쉽지도 않다. 하지만 현 정부 시스템과 금융 거버넌스에 대한 본질적 문제제기가 자칫 그의 퇴임과 함께 아무 일 없었던 듯 잊혀질까 봐 그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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