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금융생태계 창출에 초점을 맞춰야 창조금융, 모험자본 활성화 등 현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국내 자본시장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시장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신인석(사진) 자본시장연구원장은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금융당국이 자본시장의 틀을 바꾸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녹색금융처럼 금융자원을 한쪽으로 몰아주는 식의 '개입형 정책'은 정권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고 오래 지속되기도 어렵다"며 "당장 눈에 띄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자본시장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책이 추진돼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4월 자본연 원장에 취임한 후 그는 일관되게 금융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해왔다. 그는 "국내 자본시장이 질적 성장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과거 개발국가의 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가장 먼저 사적시장 활성화를 꼽았다. 국내 자본시장이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질적 발전이 더딘 이유로 규제가 없는 사적시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사적시장은 한국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주식·채권·파생상품 외에 비상장주식·비상장채권 등을 사고팔 수 있는 곳이다. 투자손실의 위험 부담을 질 수 있는 투자자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신 원장은 "미국의 자본시장 발전을 살펴보면 2000년대 들어 공적시장보다는 사적시장에서 큰 성장세를 보였다"며 "능력이 되는 투자자들이 활발한 투자 움직임을 보여야 모험자본 생태계가 정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적시장과 함께 한국거래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적시장의 체질개선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거래소의 구조개편이 우선돼야 한다는 게 신 원장의 주장이다. 신 원장은 "코스닥시장본부 분리 여부를 떠나 공적시장이 보다 성장하려면 한국거래소가 큰 틀에서 조직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는 현재 유가증권시장·코스닥시장·파생상품시장을 각각 본부 조직으로 거느리고 있다. 자본연은 지난달 28일 정책토론회에서 한국거래소 구조개편 방안으로 코스닥시장의 완전 독립, 지주회사 체제 전환, 대체거래소(ATS) 설립 등을 제시했다.
신 원장은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상장 활성화를 위해 코스닥시장을 분리해야 한다는 벤처캐피털(VC) 등 일부 업계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벤처캐피털 업계는 코스닥시장 상장기업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며 분리 후 기업 상장요건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코스닥시장 상장기업 숫자는 2000년 170개를 기록한 뒤 연평균 40~50개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다.
신 원장은 "코스닥시장의 상장기업 숫자가 줄어든 것은 거시경제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이라며 "연평균 2~3%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상황에서 유망 중소·벤처기업을 1년에 100개씩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대신 한국거래소 구조개편 논의의 초점이 차별화된 역량 개발에 맞춰질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예를 들어 코스닥시장과 같은 취지로 개설된 영국 에임(AIM)은 규제 수준이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낮다고 평가된다. 규제가 적은 만큼 상장유지 비용도 적게 든다. 또 미국 나스닥의 경우 달러 유동성이 풍부하다는 장점이 있다. 에임과 나스닥은 이러한 장점을 잘 살린 덕분에 국제화에 성공했다는 게 신 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생존환경이 악화된 기업들이 경쟁력 있는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거래소도 부단히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신 원장은 사모펀드(PEF)가 제 기능을 하는 것이 벤처 육성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대형 PEF가 다수 등장해 모험자본 시장에서 핵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연금 등 공공 분야의 '큰손'이 소규모 PEF에도 골고루 돈을 뿌려주기 때문에 시장 규모 자체가 줄어들고 모험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며 "투자 능력이 좋은 쪽에 돈을 몰아 줘야 PEF 업계가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PEF에 대한 금융당국의 정책도 과감한 규제완화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5월 PEF의 유형을 기존 4개에서 경영투자형과 전문투자형으로 단순화하는 내용을 담은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을 통과시켰지만 최종 입법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다. 신 원장은 정무위가 의결안 개정안에서 한발 더 나아간 내용을 이야기했다. PEF 분류 자체를 없앤 뒤 최대한 마음대로 투자활동을 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 원장은 "PEF의 역할은 자본시장에서 가장 외진 곳에 혈액을 공급하는 것"이라며 "마치 뱀장어처럼 자본시장의 곳곳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투자를 한 뒤 돈을 회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본시장 상품의 세금 문제에 대해서도 신 원장은 "은행권과 차별되지 않도록 과감하게 혜택을 줘야 한다"고 했다.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전문위원으로 참여해 박근혜 정부 경제정책 5년 계획의 틀을 만드는 데 일조한 신 원장이지만 자본시장 상품에 대해 세금을 늘리거나 세제 혜택을 축소하는 부분에서는 재정당국과 다른 견해를 보여왔다.
신 원장은 우선 과세형평성 측면에서 국내펀드에 적용되는 세율과 해외펀드에 매겨지는 세율을 동일하게 맞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내펀드를 통해 수익을 거둘 경우 배당소득세 15.4%만 내면 되지만 해외펀드는 배당과 시세차익에 따라 최고 41.8%의 세금이 부과될 수 있다. 그는 "해외펀드를 사들이는 게 '국부유출'이라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세율이 차별적으로 매겨졌는데 이러한 고정관념을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며 "고령화에 대비해 자본시장에 들어온 일반투자자들이 마음 편하게 해외펀드를 투자바구니에 담을 수 있도록 기존보다 세율을 과감하게 낮춰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내년 1월부터 도입되는 파생상품 양도소득세에도 반대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신 원장은 "주식·채권 등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양도차익에 과세하지 않고 있는데 파생상품에만 이를 적용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시행에 앞서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국내 주식시장의 장기 전망에 대해 신 원장은 "낙관적으로 본다"면서도 이를 위해서는 기업들의 주주가치 제고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연평균 성장률이 5~6% 넘게 유지되는 시대는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앞으로 기업들이 적극적인 주주친화 정책을 도입하고 수익성을 높이면서 투자가 활성화되도록 노력해야지만 시장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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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 제도·환경 개선목표… 금투업계 지적 리더십 회복 노력 ■ 신원장이 생각하는 자본연 역할 |
사진=권욱 기자
/지민구기자 대담=이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