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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게 운영하던 부모님 덕에 자연스레 만화와 접하고 친해져
"만화는 내게 즐거움 준 꿀 같아" 교사·만화가서 애니 회사 대표까지
다양한 분야 두루 거친 '팔방미인'
"종이만화 중심지 佛 앙굴렘 넘는 글로벌 웹툰의 수도로 만들 것"
미술교사, 출판사 일러스트레이터, 시사만화가, 애니메이션 회사 대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박재동(62·사진) 부천만화축제 운영위원장이 맡아온 직책들이다.
60여년간의 삶의 궤적 속에서 그림이라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한 박 위원장을 부천에 있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최근 만났다.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해내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듯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살아올 수 있었던 비결이 뭔지 궁금했다. 박 위원장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앞으로 갈 길은 내가 결정해야 할 부분이 많겠지만 지나온 인생을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온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돼왔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답했다.
울산에서 태어난 박 위원장은 9세 때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새롭게 정착한 곳에서 부모님은 만화 가게를 운영했다. 이런 환경 덕분에 초등학생이던 박 위원장은 만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고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박 위원장은 고등학교 입학에 실패하면서 재수를 하게 됐고 이 시기 '내 가슴에도 봄은 왔습니다'라는 첫 만화를 완성하게 된다. 만화를 그리며 입시 실패에 따른 스트레스를 해소한 그는 만화가라는 직업을 막연히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 대학에는 만화 관련 학과가 없었다. 마침 주변에서 문하생을 해보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문하생은 적성에 안 맞을 것 같아 만화와 비슷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회화학과에 입학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을 한동안 했다.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너무나 좋아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박 위원장은 "고등학교 미술선생을 하면서 너무 행복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그림을 못 그릴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그만뒀다"고 말했다.
교사를 그만두고 출판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던 그는 지난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시사만화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한다. 평소 풍자만화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직업으로서 시사만화가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그가 모집공고에 응한 것은 교사 시절 제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박 위원장은 순수회화를 주로 그렸다. 그런 그의 그림을 보고 한 제자는 "선생님 그림에는 역사와 삶이 없다"고 비판했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박 위원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시사만화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며 "한겨레신문에서 시사만화가로서의 활동은 민주화운동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박 위원장의 선택은 그에게 '한국 시사만화의 대부'라는 호칭을 선사했다. 1년에 300장씩 8년간 2,400장을 그리며 독자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 위원장은 수많은 작품 중에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관련 만평을 가장 기억에 남는 만평 중 하나로 꼽았다.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후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그림이 신문에 실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부모로부터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후 말도 안 하고 밥도 먹지 않던 딸에게 박 위원장이 그린 그림을 잘라서 보여줬더니 웃었다며 감사인사를 전한 것이었다.
박 위원장은 "만평을 통해 '지금 은퇴하지만 음악을 하고 싶으면 더 큰 모습으로 언제든 돌아오라'는 내용을 담은 그림이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여학생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는 시사만화가로 활동하며 만화의 재미, 인생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박 위원장은 "내게 만화는 꿀 같은 것"이라며 "나를 재발견하게 해준 것이 만화"라고 강조했다. 국내 최고의 시사만화가로 활동하던 그는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됐다는 판단에 따라 과감히 자리를 떠난다.
이후 한예종에서 후학양성에 힘썼다. 그런 그에게 2008년 부천만화축제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마침 작업실이 부천에 있었고 신경 쓸 게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수락했다. 그러나 일을 하다 보니 부천만화축제를 괜찮은 국제만화축제로 만들겠다는 꿈이 생겼다. 박 위원장은 지난 8년 동안 세계 유일의 어린이 만화가 대회인 세계어린이만화가대회도 만들고 부천만화축제의 내실을 다졌다.
특히 지난해 '만화 이야기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축제에 세계 최대 만화행사를 열고 있는 프랑스 작가들이 많이 참석하는 등 부천만화축제는 점차 국제적인 축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박 위원장의 꿈은 부천만화축제를 단순히 국제만화축제로 만드는 것 이상이었다. 그는 부천을 만화의 메카로 만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현재 세계 최고의 만화 축제는 프랑스 앙굴렘만화축제다. 박 위원장은 "앙굴렘은 깊은 전통이 있고 종이만화·유럽만화의 중심으로 세계인들이 메카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곳이다. 이 아성을 허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의 야심은 만화의 메카를 앙굴렘에서 부천으로 옮기는 것"이라며 언젠가는 부천만화축제가 세계 최고의 만화 축제의 장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종이만화 축제인 앙굴렘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 최대 축제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획의 중심에는 웹툰이 있다. 그는 "종이만화의 메카는 프랑스지만 웹툰은 우리가 메카다. 부천은 자연스럽게 세계 웹툰의 수도가 될 것"이라며 "현재 만화의 대세는 웹툰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부천은 세계 만화의 메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송은석기자
국내외 만화인 시민 함께 즐기는 亞대표 '코믹콘' 박성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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