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곡물시장이 공급과잉에 따른 가격폭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수년 전 극심한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 급등에 따른 물가상승)'을 겪은 뒤 전세계 농가와 농산물 공급업체들이 생산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3일(현지시간) "세계 농산물 공급량이 급증한 탓에 밀·옥수수·대두 등 주요 곡물 가격이 최근 4년 사이 가장 낮아졌다"고 전했다. 대두 가격은 올해 들어서만 28%나 폭락했으며 밀과 옥수수도 각각 21%, 23%씩 값이 떨어진 상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식량가격지수는 지난 2011년 2월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최대 밀 생산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갈등도 시장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정도다.
이처럼 농산물 가격이 속락하는 것은 2007~2008년의 애그플레이션 이후 세계적으로 농산물 생산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FT에 따르면 전세계 곡물 경작지 면적은 2005년부터 올해 사이 11%나 늘었다. 그 결과 올해 미국의 옥수수와 대두 생산량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기세를 보이고 있으며 밀 생산량도 캐나다와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역대 최대 규모로 치솟을 것으로 전망된다.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올해 곡물 소비량 대비 재고율은 24.7%까지 올라섰으며 내년에는 2003년 이래 최고치인 25%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FAO는 내다봤다.
문제는 이 같은 공급과잉 때문에 폭락한 곡물 가격이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옥수수벨트' 지역 등 주요 곡물 산지에서는 향후 몇 년간 곡물가가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FT는 "당초 전문가들은 중국의 소비량 증가와 바이오연료 수요증가로 인하 가격 반등을 기대했지만 모두 빗나갔다"고 지적했다.
곡물값 하락으로 식탁물가가 낮아지면서 세계 빈곤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곡물 시세 폭락은 빈곤으로 고통 받는 저개발국에 이득만 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계은행(WB)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단기적으로는 곡물 가격이 오르면 식비지출이 늘어 빈곤율을 높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곡물값이 오르는 것이 빈곤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며 "곡물 등 물가가 오르면 저숙련 노동자의 임금도 오르고 농가 생산량 증대의 동기 부여도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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