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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찬 명예회장님. '국내 섬유산업의 대부'이신 회장님이 떠나신 지도 일주일여가 지났습니다. 온 경제계가 비통함에 빠져 깊은 애도를 표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쉬이 잊혀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사실 저는 회장님과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 때 경제신문 기자 초년병으로 코오롱그룹을 3년간 취재하면서 회장님과 인연 아닌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회장님은 장남인 이웅렬 현 코오롱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스포츠 육성 등 사회활동에 힘쓰고 계셨습니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인상에 트레이드마크였던 인자한 미소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특히 한국 마라톤 부흥에 불살랐던 그 열정은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주 말, 오랜만에 당시 모아놨던 기사 스크랩북을 꺼내봤습니다. 빛바랜 수많은 신문 조각들 중 코오롱 기사가 여럿 있더군요. '코오롱, 인도네시아에 나일론필름 공장 건설(1997.4)' '두산전자의 코오롱전자 인수합병 막바지(1998.5)' '코오롱 르페, 월드컵16강 기원 부적팬티 판매(1998.5)' 등…. IMF 외환위기 전후로 달랐던 코오롱 이슈들이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1개 면을 꽉 채운 회장님 기사도 찾았습니다. 지난 1998년 당시 'IMF 극복의 길이 있다-최고 경영자의 저서'라는 기획시리즈였는데 회장님 자서전인 '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라는 책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경영인 이동찬, 인간 이동찬을 조명했더군요.
한평생 정도경영 앞장서 실천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재계의 신사·모범생으로 불리는 이동찬 명예회장은 한평생 경영철학과 인생의 철칙으로 '정도(正道)'를 추구해왔다. 1992년 고희를 맞아 발간한 이 자서전에서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도 '정도를 걷자'는 것이다. 무리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정도경영'. 평범하고 소박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 덤덤한 철학이 이 땅에 나일론 산업을 처음으로 일으키고 코오롱을 일궈온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이 구절은 무한한 지혜의 결정체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와 닿는다."
제가 이 글을 굳이 소개한 이유는 회장님의 정도경영이야말로 요새 기업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메시지가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조금 더 벌겠다고 불량음식을 파는 식품기업, 세금 덜 내겠다고 수백억원을 탈루한 주류회사, 갑의 자리에서 협력사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기는 홈쇼핑사, 비용을 줄이겠다며 일방적 구조조정을 서슴지 않는 외국계 담배회사, 돈벌이를 위해 고객정보를 유출하는 대형 마트 등 정직하지 못한 기업들이 갈수록 넘쳐납니다. 이들에게는 회장님의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으셨지요. 순리대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절대 무리하지 않고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순리를 따르려고 애쓴 기업인이었습니다. 물론 경영을 진두지휘할 때는 거침이 없었지요. 불의를 보면 친척 간이라도 용서 없었고요. 동(動)과 정(精)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기업인을 꼽으라면 아마 회장님이 단연 첫 번째로 꼽혔을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회장님은 평소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라는 '등산경영'을 통해 내실 경영에 힘쓰면서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익만 추구하는 기업에 울림 퍼지길
또 한눈팔지 않고 꾸준히 제 갈 길을 가라는 '마라톤 경영', 노사는 공동운명체로 대립이 아니라 공존공영을 위한 협조관계라는 '노사불이론(勞使不二論)', 돈의 노예가 돼서도 안 되지만 돈을 아낄 줄 몰라서도 안 된다는 '절약정신' 등 경영의 교과서 같은 어록을 참 많이 남겼고 실제로도 칠십 평생 '참 기업인'으로 몸소 실천했습니다. 정도경영이 어렵지만 할 수 있다는, 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후대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회장님은 오래 전 서울경제신문 기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업은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입니다. 후손에게 풍요로운 미래를 물려주는 것이 바로 기업의 사명입니다." 회장님은 떠났지만 그 정신은 대한민국 기업인 모두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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