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북측과 금강산ㆍ개성 관광을 재개하고 지난 2007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합의한 백두산 관광도 시작하기로 합의하는 등 5개 항에 사인함에 따라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의 귀환 보따리가 당초 정부 당국은 물론 대북 전문가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수준이라는 점에서 이번 현대와 북측의 합의를 계기로 남북 간 미묘한 신경전이 진행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개성공단과 개성관광을 막았던 육로통행 제한 해제 조치 외에 금강산ㆍ백두산 관광 재개 문제와 개성공단 활성화 방안,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우리 정부와의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 당국 간 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남북관계 전기 마련 계기=북한에 억류됐던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씨 문제가 해결돼 남북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 하나는 걷힌 셈이다. 여기에 현 회장이 다섯 차례나 귀환 일정을 미뤄가면서 김 위원장과의 면담을 성사시켰고 육로통행 및 체류 관련 제한을 해제한다는 약속까지 받아내 남북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됐다는 평가다. 개성공단 기업들의 경영 악화를 불러왔던 육로통행 및 개성공단 체류 제한을 김 위원장이 전격적으로 풀어준 것은 우리 정부의 당초 기대를 넘어선 조치라는 분석이다.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 경색의 상징처럼 자리잡았던 통행제한을 풀어주는 통 큰 선물을 남측에 보내면서 응수타진을 엿본 것이라는 얘기다. 결국 현 회장과의 합의를 통해 남측에 건넨 공을 정부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의 진로가 결정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부는 북한의 허를 찌르는 기습 선물공세에 일단 환영의 뜻을 표시하면서도 내심 당황해 하는 모습이다. 천해성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현대와 북측과의 합의사항에 대해 “정부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이번 합의는 어디까지나 민간 차원의 합의이며 합의사항이 실현되려면 남북 당국 간 대화를 통한 구체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른 시일 내에 남북 당국 간 합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나가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북한 제의에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진의 파악에 집중하고 있다. 또 천 대변인은 금강산 관광 재개 사안의 경우 “당국 간 협의를 통해 금강산 관광객 사망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고 재발을 방지하는 대책과 함께 우리 관광객의 신변안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정부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드러냈다. 정부 내 외교 안보라인에서는 북측이 이른바 통민봉관의 전략으로 우리 정부를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17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흔들리지 않는 대북정책은 결국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고 국제사회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 대목은 기존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국제사회의 흐름에 맞춰 대응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금강산 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활성화는 관광객의 확실한 안전보장과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 토지임대료 인상 문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현대와 북측의 합의로만 이뤄질 사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당분간은 현 회장과의 합의를 발표한 북한의 진의 파악 작업에 집중하고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흐름을 주시하면서 남북관계 변화의 계기를 타진하는 수순이 이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이번 현대와 북측 간 합의가 과거 6ㆍ15, 10ㆍ4 선언 이행에 대한 우회적 압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서 “북한의 유화 조치로 정부는 남북관계를 호전시키길 바라는 여론의 기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