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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경제 불안 키우는 리더십 위기

최형욱 뉴욕특파원


"처음에는 거의 나란히 뛰었다. 그런데 다른 나라가 하나둘씩 넘어지다 보니 한국이 어느덧 신흥국의 선두자리를 차지했고 선진국 문턱에도 이르더라"

30여년 간 공직생활 동안 한국 경제의 부침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정책 수립을 주도했던 한 전직 경제장관의 회고다. 물론 한국 경제도 1970년대 사채 파동과 기업 도산, 오일 쇼크, 1980년대 정치 불안, 1990년대 외환위기, 2000년대 카드 사태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숱한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한국은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치자'며 뒤늦게라도 구조개혁과 경제 업그레이드 기회로 삼은 반면 경쟁국은 한번 엎어지면 성장통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미국의 경제 석학이나 월가 투자가들도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그들은 한국 정부 정책의 안정성, 투명한 금융시장, 기업 경쟁력 등 펀더멘털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한국 경제의 '회복 탄력성(resilence)'에 대해서는 감탄 일색이었다. "거의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었다"고 평가했는데 위기 때마다 국민적 단결을 통해 불과 1~2년 만에 정상화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것이다. 월가에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고참 투자가들이 남아 있다.

이 같은 위기 돌파의 한가운데에는 대통령이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1월 당선자 신분인데도 경기도 일산 자택에 월가 헤지펀드의 거물이자 동남아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조지 소로스를 초청하는 깜짝 쇼를 펼쳤다. 이렇듯 자존심을 접고 한 푼이라도 외화를 들여올 수 있는 길이라면 무엇이든 직접 챙겼다.

우리 경제의 토대를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CEO)에 가까웠던 지도자였다. 박 대통령은 관료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주되 중대 사안은 장관을 제치고 실무자들의 의견까지 직접 들었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간결한 메시지에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국민적 에너지를 담아냈다. 1964년 독일의 한 탄광회사에서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손을 붙잡고 눈물 흘리던 모습은 그 결정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침몰 이후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구경꾼 화법은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의구심이 들게 한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 곁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지만 온갖 고난과 영광을 국민과 함께 하려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지난 29일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과거 잘못된 관행이나 공무원들의 초기 대응 실패를 강도 높게 비판하며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하자고 했을 뿐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지도자는 비전은 물론 구체적인 실행 방법도 내놓아야 한다. 직접 대안을 내놓던지 아니면 유능한 인재를 쓰던지 결국은 모두 대통령이 할 일이다.

현재 글로벌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우크라이나 위기, 미국의 출구전략,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재침체 우려, 아베노믹스 실패 등 여러 시한폭탄들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 27~30일 열린 세계 최대의 투자 포럼인 밀켄 글로벌 컨퍼런스의 첫 세션 주제도 '글로벌 경제, 미지근한 시기에 모멘텀을 기다리며'였다. 경기 회복세가 여전히 취약한 반면 눈에 띄는 호재는 보이지 않는 얘기다.

물론 컨퍼런스 현장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에 대해 낙관론을 펼쳤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특히 중국 경제가 경착륙하지 않더라도 성장률이 6%대로 둔화되거나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내년 하반기쯤 기준금리를 인상할 경우 신흥시장이 메가톤급 충격을 받을 게 뻔하다. 한국 경제의 체질이 튼튼하다지만 글로벌 투자가들에게 도매금으로 취급되면서 동반 패닉에 빠질 수도 있다.

한국 금융시장에 난리가 났는데도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사례에서 보듯 "정부가 하루빨리 강력한 위기대응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눈치만 보는 공무원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는 식으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고집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청와대는 평상시에는 장관들에게 권한은 주지 않다가도 대형 악재가 터지면 책임을 묻고 있고 국민과의 소통도 외면하고 있다. 이런 판에 관료들이 갑자기 위기 대응력을 발휘하거나 국민들이 위기 극복에 너도나도 동참하는 일이 가능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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