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을 없애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도입된 또래상담이 충분한 준비 없이 시행되면서 일선 학교에서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산 투입 2년 만인 올해 뒤늦게 운영방법 매뉴얼(설명서) 제작이 이뤄지는 등 무리한 정책 시행으로 세금만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교육부와 여성가족부ㆍ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등에 따르면 지난해 2월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사업이 시작된 후 올 3월 현재 전국 4,638개 학교가 또래상담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말 교육부와 여가부가 또래상담 우수 사례를 선정해 관련자를 포상했고 또래상담이 학교생활만족도와 집중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는 등 일부 효과를 거둔 사례도 있지만 상당수 학교는 또래상담이 이름뿐인 제도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서울 중랑구의 중학교 담임을 맡고 있는 이모(32) 교사는 "모범생들이나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주로 또래 상담사로 지정되는데 친구들이 그들을 상담사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며 제도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경기도 안양시의 한 중학교 교사는 "고교 진학을 위한 생활기록부 작성용이나 마찬가지"라며 "봉사활동 시간을 준다는 핑계로 지원자를 겨우 모았다"고 말했다.
각 학교에서 또래상담 사업을 담당하는 상담교사들도 제도에 대한 불만이 많다. 경기도 군포시의 한 중학교에 재직 중인 김모(30) 교사는 "지난해 느닷없이 또래상담을 하라며 예산이 배정돼 부랴부랴 동아리를 만들고 아이들을 뽑아 운영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중학교 1~2학년들은 여전히 앳되다 보니 역할 수행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장 상황은 또래상담사업 추진을 맡고 있는 복지개발원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복지개발원 관계자는 "(또래상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학교가 적지 않다"며 "이른 시일 내 초ㆍ중ㆍ고교별 각 1개 학교를 또래상담 시범학교로 지정한 뒤 다른 학교에서 적용할 수 있는 표준 모델과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일선 교사들은 또래상담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한 정부를 입을 모아 비판하고 있다. 김모 교사는 "정부가 학교폭력 대책을 급하게 만들다가 또래상담도 덤으로 끼워 넣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사업이 학교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지, 실효성은 있는지 등을 충분히 검토하고 예산을 투입하는 게 옳다"고 지적했다.
또래상담은 청소년들이 고민을 가장 많이 털어놓는 대상이 또래친구라는 점에 착안해 각 학교마다 학급별로 지정된 또래상담사나 관련 동아리 학생들이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는 제도다. 관련 예산은 지난해 17억4,500만원, 올해 20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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