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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똑같이 그리는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입니다."
국내 극사실주의(hyperrealism) 화풍의 대표작가인 고영훈(62·사진)이 8년 만에 연 개인전의 신작들을 이같이 소개했다. 1970년대 초부터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그리는 극사실주의 회화를 시작해 화단을 이끈 고 작가는 지난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 '앙데팡당' 전시장 입구에 돌덩이를 그린 가로 4m의 대작 '이것은 돌입니다'를 걸어 마치 돌이 공중에 매달린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86년에는 아직 한국관이 없던 베니스비엔날레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6일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만난 고 작가는 "정말 똑같이 닮게 그리는 게 무엇일까, 나이가 들어 시력이 나빠지면 안 보이는 대로 뿌옇게 그리는 게 더 사실적일 수 있다"며 "이제는 닮게 그리는 문제에는 더 이상 관심도 없고 사물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이를 토대로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고뇌의 결과물인 이번 신작은 백색 배경 속에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도자기 연작이 눈길을 끈다. 청화백자의 앞·옆·뒤를 그리거나 분청사기의 선명한 모습부터 뿌옇게 흐려져 사라져가는 장면을 단계적으로 그려 대상의 본질을 탐색했다. "평면 회화로 사물을 재현하는 것은 결국 일루션(환영)일 뿐"이라며 "실물의 재현을 뛰어넘어 실재가 환영인 듯 인식되는 묘한 환상성을, 나아가 실재와 환영이 하나라는 동양적 사상에 다가갔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그는 "환영이 실존으로 변화했고 실체를 알고자 하는 그 끝에는 나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다"며 자화상도 소개했다. '제너레이션(세대)' 연작은 작가 자신과 둘째 아들, 그리고 흐릿한 인물상으로 이뤄진 3점짜리 작품이다. 가운데 흐릿한 그림은 소멸해가는 아버지와 생성하는 아들이 겹쳐져 '시공(時空)의 흐름'을 보여준다. "세대가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완전히 바뀌지만 실상은 같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설명이 뒤따른다.
고 작가는 국내 정상급 화랑인 가나아트갤러리의 전속화가 중 호당 가격이 가장 높은 작가로 100호 그림이 1억~1억2,000만원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8년 전 마지막 개인전은 전시개막도 하기 전에 '솔드아웃(완판매진)'된 진기록을 갖고 있다. 1970~1980년대 구작(舊作)은 해외 소장가들이 더 많이 소장하고 있다.
작품의뢰가 많지만 치밀한 묘사를 요구하는 작품이라 제작시간이 남들 곱절 이상이다. 작업실에는 도수가 다른 안경이 8~9개나 있고 그리기 시작하면 끼니도 굶어가며 집중하는 편이다. 작가는 "그림이 느리고 생각도 정리할 게 많아 개인전까지 8년이 걸렸고 전시를 위한 전시가 아니라 발표를 위한 전시로 삼으려 했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오는 6월4일까지. (02)7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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