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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역사·정서 무시한 도로명주소


반대의 목소리가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도로명주소가 본격 도입된 지 5개월이 다 돼간다. 신사동의 우리 사무실 주소도 선릉로에 면한 161번째 길의 22번째 건물이라는 무척 건조한 의미로 바뀌었다. 정작 선릉은 2㎞ 넘게 떨어져 있고 지번 주소를 들으면 대충 알 수 있었던 지하철역 등의 주변 정보도 전혀 연결되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고 외워지지도 않는다. 선릉로 반대편은 구룡마을 부근인데, 개포동의 개포도서관의 새 주소가 선릉로4길 30인 모양이다. 이쯤 되면 이름을 정한 사람들의 성의를 의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종로구 사직로 161. 본래 세종로 1-1이던 경복궁의 주소다. 사직단과 사직터널 때문에 지어졌던 도로명이 그대로 주소에 반영된 것인데 이 길을 이왕이면 '경복궁로'로 이름 붙였어야 하지 않을까. 종로구 삼일대로 464. 운현궁의 도로명주소다. 낙원상가의 새 주소도 삼일대로 428이다. 탑골공원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삼일로에서 바뀐 이름이라 그대로 사용될만하다 여겨지는데, 정작 탑골공원의 새 주소는 종로 99이다.

'종로1'은 종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 교보빌딩으로 원래 주소도 종로1가 1번지였다. 여기서 '종로 157'이라는 주소를 보고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종묘를 떠올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역사와 기억과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건물번호를 그저 순서에 따라 매기는 바람에 생겨난 결과다.

이런 식이다 보니 주소를 바꿔 달란 민원이 엄청나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심지어 북한도 쓰는 선진적 제도라 해서 시작된 도로명주소 사업이 국민들을 대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길 찾기가 쉬워져 물류비 등 사회·경제적 비용이 절감되고 소방·치안·재난관리 등 긴급 상황에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고 국격이 제고되며 외국인 방문객 등의 실질적 활용 및 이미지 개선 효과가 있다"는 원래의 목적은, GPS 관련 기술이 발달한 요즘 대부분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17년 전인 1996년 김영삼 정부가 지번 주소가 국가 발전을 저해한다면서 '도로명 및 건물번호 부여 사업' 추진을 발표했다. 강남구 등에 시범사업까지 하다 보류됐으나 노무현 정부 때 다시 일본 잔재를 없앤다며 2007년 '도로명주소법'이 만들어졌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도로명 주소 고시 이후 2012년에 전면도입을 추진했지만 반발이 거세 미뤄졌다가 결국 시행된 것이다.

전체 도로명 16만여개의 약 20%인 3만여개에만 마을 이름과 원래 지명이 반영돼 있다. 동 이름까지 덧붙이다 보니 짧아진다던 주소는 더 길어졌고, 부동산계약서는 지번 주소를 써야만 하고, 통장과 반장 등을 통해 연결되던 동네의 의미도 희석됐다. 현실에 맞지 않는 제도를 쓰려다 보니 문제가 눈덩이처럼 쌓인다. 여태까지 4,000억원의 비용이 들었다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더 비용이 들지 알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머리로, 몸으로 기억하는 공간에 대한 정보가 결국은 건조한 일련번호로 치환되며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라는, 장소에 오랜 시간 퇴적돼 있는 역사와 영혼까지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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