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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프랑스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볼테르를 포함해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 등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의 영향으로 프랑스 혁명이 촉발됐다는 게 학계가 인정하는 정설이다. 하지만 유럽사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로버트 단턴은 대중들이 진지한 사상을 다룬 논문보다는 자극적인 이야기에 열광했다며 당대 문학이 유럽 정치사에 끼친 영향을 파헤친다. 저자는 6편의 논문을 통해 18세 프랑스 역사,지리,문화 상황을 새롭게 해석한 '고양이 대학살'로 유명하다.
'18세기 프랑스인은 어떤 책을 읽었는가'라는 물음을 갖고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을 펴낸 프랑스 역사학자 다니엘 모르네(1878~1954)와 달리 저자는 '18세기 프랑스인은 어떤 금서(禁書)를 읽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접근한다.
단턴은 프랑스 국경 가까이 있던 스위스의 뇌샤텔 출판사가 남긴 5만여 통의 주문편지와 장부책을 발굴, 25년간 자료 정리와 해독 끝에 1769년부터 1789년까지 불법 유통된 720종의 금서목록을 뽑아내고 금서들의 유통과정과 이 책들이 여론 형성에 끼친 영향을 추적한다. 저자가 꼽은 금서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처녀'와 같은 포르노그래피 수준의 고전을 비롯해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 '2440년' '루이 15세의 사생활' '계몽사상가 테레즈' '기독교의 실상' 등 지금은 거의 잊혀진 책들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금지된 베스트셀러 대부분이 포르노소설, SF, 중상비방문 같은 도서들이라며 대중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자극해 당대 사람들의 봉건적 인식 체계를 뒤흔들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금서 베스트셀러 가운데 1위인 '2440년', 2위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 그리고 15위의 '계몽사상가 테레즈'의 내용은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했다. 메르시에의 '2440년'(1771년)은 도덕적 유토피아인 2440년 파리의 모습을 통해 18세기 파리의 타락한 실상을 비판한 작품이다. 작자 미상의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1775년)는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베르사유에 입성한 뒤바리 백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로, 프랑스혁명 때 단두대 위에서 처형당하기 전까지 그녀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뒤바리 백작 부인이 루이 15세를 홀려 얼마나 국가를 파탄에 몰아 놓았는지 풍자하는 시가 특히 눈길을 끈다. "프랑스여, 그렇다면 그대는 어떤 운명인가. 여성의 지배를 받는 것. 그녀는 처녀(잔 다르크)의 구원을 받았노라. 하지만 창녀(뒤바리)에 의해 멸망하리라."
작자 미상인 '계몽사상가 테레즈'(1748년)는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 테레즈의 성생활을 다룬 포르노그래피. 책에는 지금 우리가 보기에도 다소 낯 뜨거울 정도로 자극적인 문구가 많이 담겨 있다. "(중략) 치마를 올리고 허리까지 걷어 올려 눈처럼 하얀 엉덩이를 내놓았다. 그의 엉덩이는 훌륭하게 균형잡힌 넓적다리에서 두 개의 완전한 곡선을 그리면서 솟아올라 있었다"('계몽사상가 테레즈' 중에서)
저자는 '평등'이라는 관념이 계몽 서적의 우아한 논증으로부터 대중들에게 인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층을 뛰어넘는 애절한 연애 이야기를 통해 감각적으로 서서히 스며든다고 강조한다. 독자로서 대중들은 소설 주인공들의 사랑이 신분 질서 때문에 가로막힌 상황에 함께 안타까워했으며 이러한 공감대는 고스란히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때문에 금서 베스트셀러 가운데 어느 것도 군주정에 대항해 봉기하라거나 사회질서를 전복하라고 직접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정치적 민담'을 구성해 앙시앵 레짐(구체제) 시대 정치·종교 등 기득권을 갖고 있는 권력층의 허상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군주정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던 신성함을 한 꺼풀씩 벗겨 낸다. 저자는 이 책들이 당시 앙시앵 레짐의 정통 가치체계를 근본에서 흔들었으며, 프랑스 혁명이 왜 '아래로부터의 역사'인지를 명확하게 확인시켜 준다. 3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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