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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경제가 '러시아 트랩(trap·덫)'에 빠졌다.
최근 유럽 경제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러시아 제재의 역풍으로 급속한 둔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기정사실화되면서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가 맞불을 놓을 경우 러시아에 비해 유럽이 받을 타격은 10배 이상 클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서방의 가장 강력한 제재수단으로 꼽히는 가스 수입 중단은 에너지 가격을 두 배로 끌어올려 가뜩이나 어려운 유럽 경제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럽 주요 국가들의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중단할 경우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독일은 국내 가스 소비량의 39.9%를 러시아산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의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는 25.4%에 이른다. 핀란드의 경우 무려 102.3%에 달한다. 이와 관련해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26일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와의 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최소 10년 동안은 러시아산 가스에 의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가 발발한 3월 이후 서방권에서 취한 제재조치가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국내총생산(GDP)의 1%에도 못 미쳤지만 러시아가 보복 조치에 나설 경우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은 10배에 달하는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 때문에 전 미국 재무부 및 국무부 관료들은 지금까지의 러시아 제재는 실패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유로존 경제는 이미 러시아 제재의 부메랑을 맞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와 EU의 교역규모는 3,900억달러로 미국과의 교역규모(440억달러)보다 약 9배나 많은 만큼 이에 따른 타격도 더 큰 것이다. 유로존의 2·4분기 GDP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를 기록해 제자리걸음을 했다. 유럽 최대 경제국이자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 5분기 만에 마이너스 성장을 한 영향이 크다. 독일 경제는 러시아와의 관계악화에 따른 수출 감소 여파로 2·4분기 -0.2% 성장률을 기록했다. 올 상반기 독일의 대러시아 수출은 15.5% 줄었으며 같은 기간 우크라이나 수출도 32% 급감했다. 러시아 수출 감소는 독일 일자리 5만개를 위협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역시 각각 0%와 -0.2%의 성장률을 나타내 유로존 3대 경제국이 모두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유로존 물가도 위축세로 돌아서며 디플레이션 우려를 부추기고 있다. 유로존의 7월 물가 상승률은 전월 대비 -0.7%를 기록해 예상치(-0.6%)보다 더 악화됐다.
이에 따라 2011년 4·4분기부터 2013년 1·4분기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하다가 회복세로 돌아선 유로존 경제가 또다시 침체되면서 '더블딥(경기침체 후 잠시 회복기를 보이다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이중침체 현상)'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일본식 '잃어버린 10년'의 망령이 유럽을 덮치고 있다"면서 유럽 경제가 일본식 장기침체를 닮고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일본의 경우 잃어버린 10년 동안에도 실업률이 5.5% 아래에 머물렀던 반면 유로존 실업률은 11.6%에 달하는 점에서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올해 3·4분기에 성장세가 미약하게나마 나타나더라도 고용시장의 부진을 상쇄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러시아의 유럽산 식품 금수조치가 본격화하면 유로존의 경기둔화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블룸버그통신은 66억달러에 달하는 EU산 식품 수출길이 막히는 한편 피해 농가에 대한 지원을 위해 재정지출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나토리 아넨코프 소시에테제네랄 이코노미스트는 "유로존 경제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이 악화됐다"며 "러시아 제재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에 따라 유로존 성장세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서방국가들이 강력한 러시아 추가 제재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워싱턴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게리 후프바우어 연구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손을 떼게 할 '황금 제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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