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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의 첫인상이 준 그와 같은 느낌은 먼저 장량에게 무름이나 모자람, 허약 같은 것으로 읽혔다. 이 사람은 뭔가가 실제보다 턱없이 부풀어 올라 있다, 용케 버티고 있지만 곧 파탄이 드러나고 허물어져 내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쉽게 남을 방심하게 만드는 인물, 그래서 장량은 잠시 유방을 만만하게 느끼기까지 했다.
그런데 유방을 마주 보고 선 그 별로 길지 못한 시간에 이상한 변화가 왔다. 무르고 모자라고 허약해 보이던 것들은 차츰 묘한 기대를 주는 비어 있음으로 다가오고, 다시 희미하지만 자신이 그 빈 데를 제대로 채워 넣고 싶은 욕망으로 자랐다.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참으로 큰 그릇이다. 공을 들여 키우면 천하도 담을 만하다(-이문열 '초한지' 2권 '상처와 조우' 중)
소설가 이문열은 장량의 입을 빌려 유방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삼국지 연의'의 주인공 유비와도 겹치는 인상을 주는 이 평가는 그의 호적수였던 항우와 늘상 대비되는 부분이었다. 한 자루 잘 벼린 칼처럼 사람들을 위압했던 항우와 달리 유방은 늘상 헐렁해 보이는 인상 속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부각됐다.
세상에 나서는 시점, 즉 진나라에 항거해 군사를 일으키는 나이도 유방이 항우보다 5년 정도 늦은 29세 정도로 보고 있다. 역사가들은 실제 나이차도 이 정도라고 보고 있다. 물론 아재비인 항량 밑에서 단숨에 수만의 군사를 모으며 시작하는 항우와 달리 몇 번의 승리를 거칠 때까지 수천의 군사 규모를 넘지 못한다.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아무리 몰락해 몸을 숨기고 있었다지만 초나라 장군가의 후예였던 항우와는 시작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서민 황제였다. 부모(유태공 유온)와 본인(유계 혹은 유방)의 이름에서도 역사가들은 한미한 출신을 읽어내곤 했다. 이들은 모두 태공(어르신)ㆍ온(노부인)ㆍ계(막내)ㆍ방(형님) 등의 이름을 가지지 못하다 결국 호칭이 이름으로 굳어질 정도였다.
쉬저우(徐州ㆍ옛 彭城)는 서초패왕 항우가 흥망성쇠를 함께 하는 지역이기도 하지만 유방의 출신지 패현 풍읍이 있는 곳이다. 승자의 역사에서 나타난 당연한 결과일 수 있지만 광활한 중국 대륙의 시골마을인 패현에서 40명이 넘는 한나라 건국공신이 나온다. 제후로 봉해진 공신 143명이 기록된 고조공신후자연표에 따르면 패 출신이 32명, 유방의 고향인 풍 출신이 10명이다.
건국공신 중에서도 으뜸가는 소하(蕭何)를 비롯해 죄수를 관리하는 옥리 출신 조참(曹參), 누에를 치고 상가에서 피리 불던 주발(周勃),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는 아버지 친구의 아들 노관(盧綰), 개 잡던 백정 번쾌(樊噲), 마부 출신 하급관리 하후영(夏后嬰) 등등. 고향에 있을 때 그저 검수(黔首ㆍ검은 맨머리, 즉 일반인)에 지나지 않던 그들이 유방 옆에 모여 결국 10여년 만에 나라를 세운다.
황제의 고향에 공신이 많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싶지만, 작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평가한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시골 건달들이 나중에 유방의 사람이 돼 한결같이 왕후장상(王侯將相)으로 한 시대를 다스린다. 그 모두가 패현을 중심으로 100리 안쪽에서 태어난다. 중국 전체로 보면, 하늘은 종지 안보다 좁은 패현 한 곳에 당대의 인재를 그대로 쏟아부은 셈이 된다. 그 지역과 관련된 무언가가 그들을 격려하고 분발시켜 그들의 잠재력을 한껏 끌어낸 것으로 봐야 한다."
이어 "유방이 단순히 동네 사람이라고 다 믿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를 잡고 비단 팔며 상가에서 피리나 불던 자가 유방과 전투에 나서면 누구보다 빨리 성벽에 밧줄을 걸고 넘어 올라 정예병 대여섯은 혼자서 해치운다. 소하도 패현의 말단관리였지만 유방의 끊이지 않는 군사와 군량미를 제공하며 이후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일등 개국공신이 된다. 그 시점에 갑자기 인재가 쏟아졌다기보다는 난세가 영웅들을 분발하게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쉬저우의 유방 유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한성공원과 한고조원묘다. 역시나 당대의 것이 아니라 후에 크게 조성한 것이다. 10여년 전 초한지 집필을 준비하며 이곳을 다녀갔던 작가도 이 두 곳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는 당대의 패현 저자 골목을 재현해 원래 개장수였던 번쾌의 식당 등이 있는 거리가 조성돼 있었다. 물론 다소 조잡하게 시멘트로 쌓아 올린 유적들이었다."
한눈에 관광지처럼 잘 정비된 도로를 지나 도착한 큰 대문에는 '한성공원'이라고 써 있다. 큰 인공연못 가운데 조성한 이곳에는 유방이 집무하는 장면을 재현한 장소를 중심으로 진시황을 모티브로 한 분수, 항우 관련 조각품이 있는 중소 공원이다. 역사의 중심이라거나 일관된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규모와 볼거리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있는 한고조원묘도 개념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2년에 한번 국내외 유씨(劉氏) 들이 모여 패현 인민정부 주최로 '유방문화제'를 여는 곳으로 지난해에는 국내에서도 대표단이 참석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따지면 쉬저우는 유방이 가장 무참한 패배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항우가 대군을 이끌고 반기를 든 조나라와 제나라를 치러 간 사이 유방은 제후들을 규합해 56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의 근거지인 당시 펑청(彭城)을 친다. 격분한 항우는 당시 제나라를 공격하던 본진을 놓아두고 단 3만 정예병사만을 추려 회군한다.
한편 펑청을 점령하고 잇단 승전과 수적 우위에 도취돼 있던 유방 측은 항우의 신속한 회군 사실을 몰랐다. 회군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무난한 계산과 통상적인 공격방향으로만 대비하고 있던 유방 측은 길을 돌아 배후를 친 항우군의 신속한 기습에 허를 찔렸다. 말 그대로 깨강정이 났다. 본진이 무너지고 허둥지둥 패퇴하면서 역사가들은 이때 유방 측 병사 10만이 죽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이때 하늘이 돕는다. 항우의 부대가 유방 본영을 삼중사중으로 에워싸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시점에 서북에서 불어온 모래바람에 피아가 구별되지 않을 지경이 된다. 유방은 겨우 수하 수십기와 함께 도망친다. 이 난전 중에 왕자와 공주를 만나 마차에 태우지만 유방은 속도가 느려진다며 발로 차 떨어뜨린다. 마차를 끌던 하후영이 이들을 수 차례 주워올리고 화가 난 유방은 10여차례나 하후영을 칼로 베려 한다. 결국 위기를 모면하고 빠져나간 2세 황제 영(盈)의 이 일화는 이후 '삼국지 연의'에서 조자룡과 후주 아두의 일화로 차용된다.
쉬저우에서 중국 고속철도(CRH)로 2시간30분 정도 걸리는 정저우(鄭州). 재미있는 것은 거리가 602㎞인 상하이~쉬저우 구간이나 쉬저우~정저우 구간(386㎞)이나 시간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최고 속도가 시속 400㎞에 달하지만 구간별 최고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느리다는 구간도 한국의 KTX보다는 빠르다. 지형상의 이득도 보지만 그보다는 정차역이 적은 탓이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한가지만 더 하자면, 고속철 역사며 플랫폼 시설에 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상하이 푸둥공항을 보고 놀랐듯이 기차역에서도 감탄이 이어졌다. 단지 외양만으로는 어느 선진국에도 뒤지지 않는다. 다만 운영에는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아 보였다. 역사 건물 자체는 출입구 검색대나 매장ㆍ대기실ㆍ화장실 등 관리ㆍ편의시설이 난삽한 수준이다.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지만 초보적인 수준의 영어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번 기행에 함께 한 김효재 전 청와대 수석은 "중국에 올 때마다 변화와 발전이 느껴진다. 4차선 도로만 해도 이제는 담배꽁초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 기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시민의식 자체는 아직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가 1970~1990년대에 그랬듯이 도로에서는 차가 사람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전반적인 의식수준이 조금만 높아지면 정말 무서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뤄양(洛陽)과 시안(西安)을 잇는 관문인 한구관(函谷關)은 커다란 공원이 돼 있었다. 노자가 이곳을 지나며 '도덕경'을 썼다는 속설을 받아들여 높이 10여m의 노자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공원 초입의 긴 벽면에 노자 도덕경을 새겨 병풍처럼 둘러놓았다.
한구관도 직접 올라보니 긴 세월 수차례 태워 없어져 본래 모습은 아니다. 의구심이 들었던 것은 딱히 산이 험하거나 관 자체가 공략하기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정도 길에서 수백명으로 몇만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가이드는 수천년 세월 동안 많은 전란에 시달리면서 공격하는 쪽에서 흙을 쌓아 올려 이곳의 고도가 20~30m 높아졌다고 했다. 과연 그렇다면 충분히 말이 된다. 깎아 지른 듯한 경사를 감안하고 좁은 길의 이점을 살리면 확실히 공략하기 어려운 관문이다. 하지만 20~30m면 10층 아파트를 넘어서는 높이다. 중국식 과장법일는지.
작가는 "한구관 서쪽에 서융 출신이 세운 진나라는 항상 동쪽의 군사적 위협이 큰 우려였다. 그래서 진시황의 병마용도 황릉 기준 동쪽에 있을 정도다. 높은 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지나가는 지형에서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려면 수송로 확보가 중요하다. 몸을 가볍게 한 소규모 병력에 험한 산이 큰 문제는 아닐 테지만 대군에은 부속물자ㆍ군량 등이 따라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제(한고조) 유방이 드디어 제위에 오른 후 어느 날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벌이며 묻는다. 왜 항우가 아닌 자신이 천하를 얻었느냐고.
이에 왕릉이 나서 고제는 오만해 사람을 업신여기고 항우는 너그러워 다른 이를 사랑할 줄 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고제는 전쟁에서 이기면 항복한 자에게 다시 그 지역을 나눠줘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나눴고 항우는 그를 의심해 땅을 얻어도 이익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고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무른 장막 안에서 계책을 짜내어 천리 밖의 승패를 결정짓는 일은 짐이 자방만 못하고, 나라를 진정시키고 백성들을 어루만져 군중에게 곡식을 대고 양도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데는 짐이 소하만 못하오. 또 백만 대군을 이끌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쳐들어가면 반드시 빼앗는 재주는 짐이 한신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한 시대가 낳은 걸출한 인재라 할 수 있소. 하지만 그들을 손발처럼 부린 것은 짐이었소. 짐은 그들을 잘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외다." (-이문열 '초한지' 9권 '황제가 되어')
아무것도 없는 유방이 외견상 모든 것을 갖춘 항우를 이긴 것은 단 하나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능력' 그 차이였다는 얘기다. 이게 둘의 운명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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