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모 호텔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호텔을 만들기 위한 호텔 일류화 프로젝트의 말단으로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프랑스인 M을 만났다. 7개 국어에 능한 그는 유럽의 저명한 호텔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후 홍콩·싱가포르·방콕의 명문 호텔 등에서 임원을 두루 지낸 호텔 전문가였다. 직제상으로 그는 간접 보스였고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았지만 자상하고 젠틀한 면 때문에 매우 빠른 시일 내 신뢰를 쌓고 친한 사이가 됐다. 속칭 '코드'가 맞은 것이다.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같이 수행하면서 치열한 토론을 거치기도 했고 그에게서 여러 가지 선진 업무 처리의 노하우를 습득하면서 필자의 개인적인 성장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어느 날 우리는 자료를 만드는 데 필요한 각 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및 국민총소득(GNI) 순위를 갖고 논쟁을 벌였다. 논쟁의 발단은 이러했다. 당시 프랑스와 한국은 GDP 및 GNI 랭킹에서 꽤 차이가 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한국이 쾌속 성장을 이루던 폭발적인 경제 성장 시기였다. 또 모든 일을 빨리빨리 성취하는 것에 익숙했고 불가능 역시 없다고 스스로 도취됐던 터라 의기양양하게 10~20년 내 한국이 프랑스를 추월할 수 있다고 호기를 부렸다.
지적이고 조용하게 자신의 주장을 펴는 스타일의 M은 가타부타 부연 설명을 늘어놓지 않고 딱 한마디를 넌지시 던졌다. "당신 나라가 일본에 합방됐을 때 이미 프랑스에는 노동조합이 설립돼 있었다"고. 100여년 전 파리에서는 향후 100년 하수량의 증가를 예측해 하수도 시스템을 완비했고 가로수 관리를 위해 파리의 가로수마다 고유번호를 부여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설명도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의 한마디에 비수를 맞은 듯 충격을 받고 더 이상 주장을 이어갈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논리적인 설명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GDP와 GNI는 그때보다 몇 배 더 성장해 다시금 자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같은 자부심이 그때처럼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나라 곳곳에서 시스템의 부재, 지켜지지 않는 매뉴얼, 안전의식 및 직업 윤리의 결여 등으로 소중한 생명이 희생을 치르는 참사를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쾌속 성장의 샴페인에 취하기에 앞서 인간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마음, 기본 중의 기본을 습득하는 하는 마음, 당장의 성과가 아닌 100년 후를 내다보는 마음을 갖춰야 했던 게 아닐까. 숫자는 숫자일 뿐, 우리는 그간 숫자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사람을 잊고 있었다. M과의 그날 밤 대화가 떠오르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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