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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에서 화폐 경제의 발달은 군주의 권력과 비례했다. 화폐 제조는 군주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인 동시에 힘의 상징이었다. 금본위제 아래에서 화폐를 제조할 만큼의 금을 보유한 이도 군주 외엔 상상하기도 어렵다. 화폐 통용 지역도 군주의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와 일치한다. 고대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서양의 최초의 동전 일렉트럼을 메스포타미아와 이집트 전역으로 전파할 수 있었던 것도 지중해 일원의 패권을 장악한 덕분이다.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가 본격적인 화폐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첫 번째 제국이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군주들은 국가와 왕실 재정이 여의치 않아 잔꾀를 부렸다. 화폐에 들어가는 금과 은의 함량을 속이고 심지어 금화에 구리를 섞기도 했다.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에도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유래된 용어가 중앙은행의 화폐주조 차익을 의미하는 시뇨리지 효과다. 시뇨리지는 '군주의 권한(droit de seigneur)'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따왔다. 지금은 유로화로 대체된 프랑스 화폐단위인 프랑도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왕이 생포돼 영국에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만든 금화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Francorum Rexㆍ프랑스 왕)에서 유래했다.
△시뇨리지 효과를 가장 크게 누리는 국가는 다름아닌 미국. 경상수지가 아무리 적자를 보여도 국가부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또한 중앙은행(Fedㆍ연준)의 발권력 때문이다. 기축통화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미국은 1971년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금 보유량과 무관하게 달러를 무한대로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발권력과 정치적 파워가 비례함은 고대와 현대가 다를 바 없다. 유럽과 일본 같은 거대 경제권의 양적완화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회사채 시장 구원투수로 나섰다. 금융위기 때처럼 패닉 상황도 아닌데 민간 기업에 구명줄을 내려주는 것이 과하다는 지적이 있는 한편에선 금융시장안정 역할이 한은법에 새로 명시된 것만큼 그 정도도 못하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에서 일고 있는 중앙은행의 역할과 기능 문제를 우리도 이제 따져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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