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없는 투기성 자금이 국제상품시장으로 쏟아지는 바람에 올 들어 원유가를 비롯해 금속ㆍ비금속은 물론 곡물, 심지어는 차(tea)에 이르기까지 전 상품시장이 투기장화하고 있다. 전문 트레이더들도 깜짝 놀랄 만큼 가격이 치솟아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거품론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의 경기가 꺾이면 상품가격이 하락하는 게 지금까지의 시장원리였다. 하지만 올 들어 두달간의 장세는 신용경색의 와중에서 대기성 투기자금이 집중적으로 상품시장에 쏟아져 하늘 높은 줄 모르게 가격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은 29일 시간외거래에서 배럴당 103.05달러까지 치솟아 가격기준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2차 오일쇼크 때인 지난 1980년의 최고치인 배럴당 103.76달러에 근접하는 것이다. 4월 인도분 금값도 시간외거래에서 사상 최고치인 온스당 976.00달러까지 치솟아 ‘온스당 1,000달러 시대’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4월 인도분 은값은 1980년 이후 최고치인 온스당 19.60달러까지 올랐고 5월 인도분 구리 가격도 장중 3.87달러까지 상승해 21개월 만에 최고가를 경신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올 들어 두달간 천연가스 가격은 26%, 석탄 56%, 백금 41%, 밀 32%, 코코아 가격은 38%나 각각 올랐다. 고급 밀 가격은 지난해 4배나 폭등한 가운데 올 들어 하루에 25%까지 치솟는 기록을 깨고 있다. 이처럼 상품시장이 천정부지로 뛰는 것은 헤지펀드를 비롯한 투기성 자본이 대거 상품시장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의 전망은 불투명한데다 미국 국채(TB)는 너무 올랐고 부동산시장은 바닥이 어디인지 모른 채 내려가고 있는 가운데 단기시장에 돈을 넣자니 미국 중앙은행(FRB)이 금리를 내려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여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도피처가 상품시장이라는 인식이 뉴욕 월가를 비롯해 글로벌 시장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게다가 달러 약세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미국 주식과 채권시장 등 달러화 표시자산이 빠른 속도로 상품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도 상품시장 랠리의 원인이다. 상품시장에 자금이 폭주하는 현상은 거래량 급증에서 엿볼 수 있다. 전세계 상품시장에서 곡물시장 거래량이 1년 사이 32% 급증했고 금속ㆍ에너지 부문도 같은 기간 29.7%, 28.6% 각각 늘어났다. 세계 최대 상품거래소인 뉴욕상업거래소(NYMEX)의 거래건수는 170만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163% 증가했다. 막대한 자금이 빠른 속도로 상품시장에 쏟아지면서 투자자들은 자그마한 뉴스에도 가격을 수직으로 밀어올리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밀 관세 인상 소식에 고급 밀 가격이 하루에 20% 이상 올랐고 나이지리아 반군의 움직임에 유가가 치솟고 있다. 또 금융시장이 발전하면서 상품연계펀드들이 크게 활성화된 것도 올 들어 상품시장의 이상 폭등을 야기했다는 분석이다. 그동안 상품거래는 전문 딜러들이 자신들만 아는 용어로 거래하는 재래시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전자거래를 활용하고 파생상품을 이용해 다양한 상품펀드가 생기면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도 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투자회사 스탠퍼드번스타인의 벤 델 애널리스트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01년 이래 상품시장에 쏟아진 자금은 대략 1,750억달러에서 2,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4분의1이 곡물시장에 투자돼 최근 밀 가격의 고공행진을 촉발했다는 것.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품시장의 거품론이 제기되고 있다. 댄 바세 곡물담당 애널리스트는 “옥수수ㆍ밀 가격을 쳐다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다”면서 “이들 가격이 고평가된 게 확실하다”고 지적했다. 거품론자들은 중국ㆍ인도 등 이머징마켓의 성장으로 상품수요가 급증하는 것 이상으로 가격이 올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투기성 자금이 마지막 탈출구로 생각하는 상품시장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높은 가격이 그대로 유지될 경우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고 세계경제도 성장둔화에 빠질 것은 분명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