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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토박이들은 청와대 뒤편 고개 위에 자리잡고 있는 자하문(창의문) 밖을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칼을 씻는 정자'라는 의미다. 실제로 상명대 삼거리에서 북악터널 쪽으로 우회전을 해 100m 정도 올라가면 오른편에 정자가 있다. 이제는 지명처럼 굳어진 세검정이 바로 이곳이다. 이 일대에는 서울시내나 강남과는 또 다른 서울이 있다.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호그와트처럼 고개 하나만을 넘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도심과 바로 인접해 있으면서도 풍광과 분위기가 마치 설악산이나 오대산의 한 자락인 듯하고 지하철역도, 아파트도 없지만 옛 도성 한양의 기품이 서슬 푸르게 살아 있는 곳. 대형마트와 콘크리트·네온사인이 없는 서울의 민낯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 오늘은 서울 안의 별유천지 자하문 밖으로의 여행이다.
구기동·평창동에서 부암동으로 이어지는 창의문 밖은 또 다른 이름으로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난 1968년 1월21일 지금은 귀순해 목사가 된 무장공비 김신조씨를 포함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선택한 코스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 124군 부대 31명은 시내버스를 탈취해 타고 자하문을 넘어 청와대 바로 뒤까지 접근해서 군경과 대치하다 대부분 사살됐다. 그 자리가 바로 당시 종로경찰서장이었던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서 있는 곳이다. 그 사건 이후 서울을 둘러싸는 도성을 따라 난 등산로는 50여년간 폐쇄돼 그 자태를 감춰왔었다.
그렇게 은둔의 세월을 보냈던 부암동과 평창동, 그리고 구기동으로 이어지는 이곳 창의문 밖은 최근 몇 년 새 갤러리를 비롯한 문화 인프라와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북한 게릴라들과 맞서 싸우다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 동상 맞은편에는 윤동주문학관이 들어서 있는데 서울 속의 무릉도원 세검정을 여행하는 코스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부암동 일대에는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던 백사실(백석동천)터 등 수많은 역사·종교 유적지들이 터를 잡고 있다.
문화유적지 외에도 피아노 연주 위주의 공연을 이어가는 부암아트홀, 전통문화를 교육하는 문화공간 무계원 등이 있다. 창의문 고개를 넘어 부암동사무소를 끼고 왼편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무계원은 원래 익선동에 있던 요정 오진암이 헐리면서 그 자재의 일부를 가져와 복원한 곳이다.
이곳의 관리직원 전덕진씨는 "오진암은 청운각·대원각·삼청각과 함께 일세를 풍미했던 요정이었다"며 "무계원이라는 이름은 바로 옆에 있는 안평대군의 별장터의 바위에 새겨진 무계동(武溪洞)에서 따온 것"이라고 말했다. 오진암에서 무계원으로 변신한 이곳에서는 전통예절·다도 등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주민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의 이름 무계동은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이곳에 있던 별장에서 잠을 자다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았고 그곳의 풍경을 화가 안견에게 설명해 불후의 대작 몽유도원도가 탄생하게 됐다는 데서 유래한다.
부암동의 명소를 일순하려면 상명대를 출발해 이광수 별장터, 홍지문 및 탕춘대성,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을 거쳐 안평대군 이용 집터, 현진건 집터, 반계 윤웅렬 별장, 윤동주 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창의문, 환기미술관, 백사실 계곡(백석동천), 세검정 순으로 돌아보면 쉬지 않고 발품을 팔아도 하루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 지역을 구성하는 문화 인프라의 주축은 아무래도 미술관들이다. 토탈미술관이 1992년 처음 개관한 데 이어 가나아트·서울옥션 같은 대형 미술관들도 1990년대부터 잇따라 들어섰다. 이응노미술관도 지난해에 문을 열었다.
문화유적부터 갤러리까지 부암동에서 평창동·구기동에 이르는 지역은 운치 있는 풍광과 유적·갤러리 등 볼거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문화관광의 보고인 셈이다.
부암동 관광안내를 맡고 있는 김미자 해설사는 "몇해 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커피프린스' 등이 부암동에서 촬영되고 모 방송사의 교양 프로가 부암동을 소개하는 프로를 내보낸 후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곳의 고즈넉함을 맛보려면 주말이나 공휴일보다는 한가한 평일을 택하는 것이 좋다.
독자들과 이 지역주민들을 위한 잔소리 한마디. 이 글을 읽고 부암동·평창동 일대를 완상하시려면 가능한 한 차를 집에 모셔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를 권한다. 이 일대가 드라마 등 TV에 몇 번 소개된 다음부터 주말이면 승용차들이 밀어닥쳐 북새통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난리를 견디다 못해 이사를 간 주민이 있을 정도다. 이곳을 조용하고 우아한 서울로 보존하는 것은 지역민들만의 책무가 아니라 이곳을 구경하러 오는 모든 이들의 의무라는 것을 유념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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