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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9월. 월가 점령 시위가 한창이던 때 시위의 진앙지였던 뉴욕 맨해튼 남단의 주코티 공원을 찾았다. 당시 세계 언론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었기에 기자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평온했다.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시위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대학생·그래픽디자이너·실직자·화이트칼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노래 부르고 심지어 향을 피워놓고 종교의식 같은 행위를 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시간에 맞춰 인근 월가를 돌면서 "우리는 99%다(We are the 99%)"라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에서 그나마 시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그곳에서 만난 한 30대 여성은 자신은 1년째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데 정작 탐욕으로 위기를 초래한 월가와 가진 자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져 시위현장에 왔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진 듯했다. 제대로 된 지도부도 없고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방향성도 없었다. 그럼에도 80여개국에서 동조 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취지만큼은 전 세계인들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월가 시위는 표면적으로는 월가의 탐욕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누적돼온 양극화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지난 수십년 동안 소득 상위계층의 실질소득은 크게 늘어난 반면 중산층 이하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시위 본질은 누적된 양극화 문제
과거 미국사회에서는 상당한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무덤덤하게 지냈다. 워낙 땅덩어리가 커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서로 섞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피부로 격차를 체감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다. 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먹고살며 인생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더 이상 그런 공식은 통하지 않게 됐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로 전 세계에서 선풍적 반향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이 시위와 관련해 "경제위기 자체는 물론이고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한 분노와 허탈·좌절을 표출하는 것이다. 정의와 공평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회적 불평등의 확산, 부의 분배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때라는 뜻이다.
세계로 번져나갔던 월가 시위는 그해 11월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전격적으로 주코티 공원을 폐쇄하고 시위대를 쫓아내면서 끝났고 점차 세인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있다. 월가 점령 시위 3주년을 맞은 17일. 주코티 공원에서는 수십 명의 사람만이 다시 한 번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그때를 기억했다. 언론의 관심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위가 제기했던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부터 6년, 월가 시위가 벌어진 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청년실업 등은 지금도 각국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아니 오히려 증폭되는 양상이다. 최근 스코틀랜드 등 유럽에서 일어나는 분리독립의 열풍이나 극단주의 세력의 등장배경에도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갈등 조정·사회 통합 능력 키워야
이는 자본주의의 미래와도 직결된다. 1월에 열린 세계의 0.1% 부자들이 모인다는 다보스포럼(WEF) 주제는 '세계의 재편(Reshaping of the World)'이었다. 2008년에 터진 금융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된 마당에 위기 이후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WEF는 앞으로 세계 경제 체계에 위협이 되는 요인으로 소득격차를 지목했다. 소득 양극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 없이는 어느 국가나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소득 불균형 문제뿐 아니라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일자리를 놓고 겨루는 세대 갈등, 그리고 좌우의 이념적인 대립까지 갈등구조가 중첩돼 있다. 반면 토론을 통해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를 통합·안정시키는 능력은 너무나 뒤떨어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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