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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0월26일] 팔레비


쿠데타와 근대화, 친미(親美), 독재와 부패. 팔레비 전 이란 국왕의 일생을 압축하는 단어들이다. 1919년 10월26일 츨생 당시 신분은 장군의 아들. 부친 레자 칸 장군이 국왕 자리를 차지한 1925년 왕세자에 올라 22세 때인 1941년 영국의 도움으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2차 대전 초기 독일편에 섰다 퇴위당한 부친 대신 왕좌에 앉았지만 그의 권력은 보잘것없었다. 절대권력을 갖게 된 것은 1953년. 중동에서 처음으로 석유 국유화를 단행한 민족주의자 모사데그 총리를 제거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조종한 쿠데타 덕에 권력을 잡았다. 비밀경찰 사바크를 통해 굳어진 독재권력을 팔레비는 근대화에 집중시켰다. 이란을 2000년까지 세계 5대 강국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백색혁명’은 성과가 적지않았지만 국민적 저항을 불렀다. ‘이란 민족은 아랍족이 아니라 유럽인과 같은 아리안 인종’이라며 강행한 서구화 일변도 정책 탓이다. 종교계와 국민들의 반발은 1979년 회교혁명으로 이어져 팔레비 정권을 무너뜨렸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물가가 50%까지 치솟았던 경제난도 몰락을 재촉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오일달러에도 팔레비의 개혁이 실패한 것은 과도한 군비증강 등 방만한 재정운용과 화장실을 금으로 도배하는 등 사치와 부패가 겹쳤기 때문이다. 쫓겨난 팔레비는 미국과 모로코ㆍ바하마ㆍ멕시코ㆍ파나마를 전전하며 복권을 꿈꾸다 1980년 이집트에서 췌장암으로 죽었다. 유럽과 이스라엘에도 판매를 거부한 최첨단 전투기까지 팔레비에게 넘겨줬던 미국도 이란에서의 이권을 모두 잃었다. 반미감정도 거세졌다. 팔레비 시절 제공한 원자로는 핵개발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애초에 쿠데타 따위의 공작을 펼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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