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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스펙과 기업 인재관

이형우 마이다스아이티 대표이사


올해 초 삼성이 신입사원 채용방식을 변경하려다가 전면 유보한 적이 있다. 이 기업이 채용방식을 바꾸려 한 것은 국내 대학 졸업자의 절반에 가까운 20여만명이 입사시험에 응시하면서 몇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기업의 입사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사교육 시장이 커졌을 뿐 아니라 지원자들을 수용할 고사장을 마련하고 시험 관리를 위해 수많은 임직원을 투입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이 기업 역시 좋은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채용인원의 일정 비율을 지방대학 출신들에게 할당하고 해외에서도 별도 시험을 실시해왔다. 아쉽게도 계획이 유보되긴 했지만 새로 도입하려 했던 채용방식에는 서류전형을 통해 직무와 관련 없는 스펙 쌓기를 배제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었다.

개인자질 드러내는 신호 인식 굳어져

이 문제가 한창 논란이 될 무렵 우연히 기업 채용시험 대비 문제집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왜 명문대학 졸업생들까지 취업을 위해 학원에 다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출제 문항이 대입 수능시험과 거의 유사했기 때문이다. 좋은 인재를 채용하는 것은 모든 기업의 꿈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을 뽑기 위해 중·고등학교 때부터 풀어왔던 시험문제를 다시 풀도록 해야 하는 걸까.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으로서 채용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채용을 하든, 낯 모르는 수천명의 지원자 중에서 누가 좋은 인재인지를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시장에서는 이를 '정보의 비대칭성'과 '시장신호(market signaling)' 이론으로 설명한다. 지원자는 취업하려는 기업에 대해 잘 알지만 기업은 지원자들의 인격과 역량을 일일이 확인할 방법이 없다. 기업이 확보한 몇 장의 서류에는 그 사람의 품성이나 자질이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보의 비대칭 현상이 발생한다. 지원자는 기업에 대해 알고 있는 반면 기업은 지원자들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력이나 스펙이 개인의 자질을 드러내는 일종의 신호 역할을 한다. 이력서에 기재된 학력이나 스펙이 '나는 쓸만한 사람'이라는 광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스펙 쌓기에 골몰한다.

기업이 스펙을 고려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젊은이들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남들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데 자신만 가만히 있으면 불안감만 커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연애·결혼·출산·인간관계를 포기한 '사포세대'로 불린다. 이들에게 사회는 꿈을 실현하는 기회의 장이 아니라 절망의 벽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화한 지 오래됐다. 규율사회가 무언가를 금지시키는 부정성의 사회라면 성과사회는 무언가를 하도록 하는 긍정성의 사회다. 성과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시험문제를 풀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다양한 잠재역량이다. 많은 기업이 지식을 첫 번째 역량으로 꼽지만 지식은 책 속에도 있고 동료나 상사로부터 얻을 수도 있다. 약간의 노력만 하면 어디서든 얻을 수 있는 것이 지식인 것이다. 하지만 열정이나 전략적 사고, 관계 같은 잠재역량은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기업은 사람을 채용할 때 지식이나 스펙을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

기업 잠재역량 인재 뽑는 기준 세워야

스펙은 그 사람의 역량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스펙이 반드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력서의 빈칸을 채울 목적으로 스펙을 쌓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기업에 취업하고 싶다면 이력서에 담을 수 없는 잠재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기업 역시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본래 스펙은 설명서나 시방서(specification)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기계나 건축물에 적용하는 용어를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사람을 얼마나 기계적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가늠케 한다.

과거에는 사람이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됐지만 지금은 사람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좋은 성과를 올린다. 이제 기업은 편하고 쉬운 기준으로 사람을 선발할 것이 아니라 밝은 눈으로 사람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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