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날 때부터 아는 자(生而知之者)가 으뜸, 배워서 아는 자(學而知之者)가 그 다음, 어려움을 겪고서야 배우는 자(困而學之)를 제일 아래라고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곤란해지기 전에 배우라는 권학(勸學)의 충고다.
그런 배움이란 오랜 기간 책을 본다는 의미로 통했다. 하지만 손에 쥐어줄 수도 보여줄 수도 없는 추상적 개념을 표현하는 것은 어렵기 마련, 그래서 고안된 것이 이야기요 그림이다. 그렇게 유학의 논어나 맹자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은 결국 핵심적인 가르침을 설명하거나 최소한 반면교사로, 이로도 부족하면 퇴계가 선조에게 성리학을 설명한 그림 병풍 '성학십도'처럼 기하학적 그림이 된다. 플라톤이 유토피아 사상을 설명하는 '크리티아스'에서, 오만한 아틀란티스가 신들의 노여움을 산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과 문학을 통한 새로운 인문학 운동을 이끄는 조너선 갓셜 교수는 인간이라는 종이 이러한 이야기 중독자라고 규정한다. 진화생물학, 심리학, 신경과학의 영역에서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즉 이야기하는 인간을 설명한다. 이 이야기는 재미와 쾌감을 주는 것에 멈추지 않고, 인간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공감 능력이 커지고 삶의 딜레마를 훨씬 수월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즉 스토리텔링이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도록 진화되고 고안된 기술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야기에 몰입한다. 그게 책, 영화, 공연 아니면 다른 어떤 형태의 스토리텔링 형태든 마찬가지다. 동화 '피터팬' 속 네버랜드와 영화 '슈퍼맨'을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멀리는 역사 서술과 종교, 가까이는 언론의 사건 보도와 스포츠 중계도 이야기의 형태를 추종하게 되는 이유다. 소설과 시가 '사형선고'를 받은 지 오래라지만, 전세계적으로 매년 신간이 수만권 출간되고 그 수도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갓셜 교수는 이야기가 코카인과 같은 마약이라고 말한다. 지루하고 가혹한 현실에서 도피해 '뿅 가기' 위한. 더불어 이야기를 통해 대가 없이 감정을 체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꿈에서 그렇듯 실제라면 위험할 많은 행동들에 몰입하며 우리는 사회생활의 주요 기술을 배운다.
그러니 쉽게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매력이 없다. 갈등은 바로 이야기의 본질이지만 반드시 해결되고, 악당은 오래 행복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아무리 잔인하고 외설적인 소재를 담은 이야기도 고전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 대상이 악당이라면 도덕적 효용을 인정 받기 때문이다. 살인·강간은 물론 사람 고기를 그 부모에게 먹이는 이야기,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희곡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다. '보바리 부인' '롤리타' '시계태엽 오렌지'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저자는 아이들의 터무니없는 상상을 막지 말고, 신화에 관대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인물과 줄거리에 정서적으로 빠져들면 쉽게 영향받고 조작된다는 점은 분명히 경고한다. 사상과 정서를 청중에게 감염시키는 것이야 말로 예술가의 임무라고 했던 톨스토이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 섬뜩한 얘기가 된다.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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