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는 그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지요. 어른들이 마땅히 청소년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고 공감하는 의사들이 뭉쳐 그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북 전주에서 마취과 전문의로 활동하는 이형구(59·사진)씨는 수술 일정이 없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매달 지역 중고등학교·대학교를 돈다. 학생들에게 무료 심폐소생술(CPR)을 가르치는 무료강의를 한지도 10년이 넘었다. 이씨와 같은 지역 몇몇 의사들도 틈나는 대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치료 도움을 요청하는 학생들을 찾아 왕진을 나간다. 이들은 '청소년의 안전을 생각하는 의사들의 모임', 약칭 '청의' 소속 의사들이다. 이씨는 지난 1997년 원년 멤버로 현재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이 상임이사는 지난 2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바쁜 의사들 모임이어서 거창하고 내세울 만한 활동은 없지만 교육과 치료가 필요한 청소년들이 여전히 많기에 17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의의 주된 활동은 아동·청소년 접근이 많은 놀이시설 안전실태를 조사해 지자체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거나 청소년 안전교육을 위한 교육기관 강의·강습,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치료 등이다. 현재 회원 80여명 중 지역 후원병원 의사 65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 이사는 "친구와 싸워 치아가 크게 깨졌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간 학생을 모임소속 치과의사가 치료해주는 등 치료 의뢰가 오면 의사들이 짬을 내 달려간다"며 "전북 지역 보호관찰소의 보호를 받는 청소년들에게 상담과 안전교육도 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에도 우석대 학생들에게 응급처치 강의를 했다. 그는 "학생들의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지키는 방법을 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안전을 소홀히 하는 학교와 사회의 안전불감증을 꼬집었다.
사실 그도 17년 전 비통한 일을 겪기 전까지 안전에 대해 무감각했었다. 1997년 그는 스키장 사고로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을 하늘로 먼저 보내야 했다. 사고가 난 스키장 안전시설과 구급대원 대응은 엉망이었다. "안전에 대해 '대충대충'하는 행태에 화가 났지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딛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의사들과 함께 그해 말 모임을 발족했다. 전주시내 80여곳의 놀이터 안전점검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대학생들을 일본에 보내 선진국 안전시설을 조사한 후 보고회를 열기도 했다. 시의회에서 안전시설 공청회와 공개토론회를 열어 아이들을 위한 안전기준에 관련된 조례를 일부 개정하는 성과도 올렸다. 2007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이 이사는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나타나듯이 사후약방문식 대응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며 "아이들을 지키는 일은 개개인의 일이 아닌 국가의 책무"라고 말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청의는 청소년 안전·건강을 위한 연구위원회를 조직할 계획이다. 청의의 심리·정신건강을 담당하는 홍선미 소장은 "청소년 치유 연구에 더 힘쓰고 관련 세미나도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사는 청의의 활동이 내세울 만한 게 없다면서도 비슷한 의사모임들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않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아쉬워했다. 그는 "생명과 건강을 최일선에서 돌보는 의사들이 아이들 안전에 앞장서야 하며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회안전망을 세우는 것은 어른들의 책무"라며 "소중한 아이들을 잃고서야 깨닫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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