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베네수엘라의 한 국영 마트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기다리던 80대의 노부인이 물건을 사려고 몰려든 수천 명의 인파에 떠밀려 압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는 물가와 극심한 물자 부족이 빚은 참사다.
중국발 글로벌 경기둔화로 세계 각국에서 디플레이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한편으로 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 등 일부 남미 국가들은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가 찍어낸 '돈의 홍수' 속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달러화 강세와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 원자재 가격급락 등 글로벌 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세계 경제는 냉탕과 열탕이 혼재하는 극심한 불안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 포브스지는 2일 고물가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가 과거 2차대전 직후의 헝가리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수년 전 짐바브웨처럼 통제 불가능한 초(超)인플레이션 국면으로 넘어갈 기로에 서 있다고 경고했다. 초인플레이션이란 물가가 50%를 넘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는 상태로 베네수엘라는 지난해 12월 말 현재 마지막으로 발표한 공식 물가상승률이 68.5%를 기록해 이미 수치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에 진입했다. 정부 공식지표는 그나마 완화된 수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말 현재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율을 443%대로 보고 있으며 미국 존스홉킨스대 산하 정책연구기관인 케이토인스티튜트는 올해 인플레이션율이 808%에 이른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또 다른 남미국가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루블화 폭락에 시달리는 러시아 등도 치솟는 물가로 신음하고 있다. 브라질 정부가 발표한 7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9.56%로 12년 만에 최고치에 달했고 아르헨티나도 14.85%를 기록했다. 러시아도 올해 들어 물가지수가 전년 대비 15~16%대의 급등세를 보이는 실정이다. 브라질의 경우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주요국 가운데 최고 수준인 14.25%까지 올렸지만 전기요금 급등으로 물가는 잡지 못한 채 경기만 악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러시아에서는 과일과 채소 등 식품 가격이 뛰면서 서민 생활에 어려움이 더해지고 있다.
이처럼 일부 신흥국에서 통화가치 급락으로 급격하게 뛴 물가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있는 한편 상당수 주요국 경제는 디플레이션 압력에 짓눌리고 있다. '아베노믹스'에 힘입어 장기 디플레이션에서 막 빠져나오려던 일본은 중국발 침체의 늪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형국이다. 신선식품을 제외한 근원 CPI 상승률은 올해 7월 현재 전년 동월 대비 0%로 2년여 만에 처음으로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다. 가계소비 지출도 마이너스로 돌아선 상태다. 디플레이션 탈출을 자신하던 아마리 아키라 경제재정상은 "일본이 디플레이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도 저물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CPI 상승률은 지난 1·4분기 전년 동기 대비 -0.1%에 이어 2·4분기에도 0%에 그쳐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목표치인 2%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 싱가포르와 태국·대만·그리스·이스라엘 등은 2·4분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에 그쳤다.
한편 초인플레이션으로 2009년 자국 통화 발행을 포기한 짐바브웨의 경우 수년 만에 디플레이션으로 급전직하했다. 블룸버그는 2008년 5,000억%를 기록했던 짐바브웨가 달러화를 받아들였으나 수입품 가격하락으로 제조업이 죽으면서 현재는 물가상승률이 -3%에 육박해 경제가 활력을 잃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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