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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여름, 폴란드 바르샤바의 마르클레브스키 거리는 칙칙한 회색 건물로 둘러쌓여 있었다. 마차들이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고, 사람들의 행색은 남루했다. 고깃값이 무려 60%나 치솟은 것을 비롯해 각종 식료품 가격이 급등하는 바람에 고단한 삶이 이어졌다. 계획경제체제 아래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은 결국 파업에 돌입했다. 그단스코 조선소의 레흐 바웬사 노조위원장이 이들을 이끌면서 노동자들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이들은 자유노조연대(Solidarity)를 만들어 폴란드의 개혁을 이끌었다. 이런 변화의 바람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10년 여름, 과거의 마르클레브스키 거리는 찾아볼 수 없다. 이름도 '요한바오로2세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번쩍이는 고층건물들이 줄지어 서있고, 신형 자동차들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사람들의 복장도 화려해졌다. 또한 폴란드가 지난 30년 동안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던 서유럽 국가들이 심각한 재정 적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반면 폴란드는 지난 해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을 나타냈다. 폴란드는 지난 해 1.7%의 GDP 성장률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3%의 성장률로 EU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폴란드는 자유노조연대를 출범시킨 파업 이후 30년 만에 GDP(국내 총생산) 기준으로 4배나 부자가 됐다. ◇냉철한 머리와 행운에 힘입어 경제 위기 피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폴란드의 성장세에 대해 "냉철한 머리와 행운에 힘입어 경제 위기를 피했다"고 분석했다. 폴란드는 경제 위기가 발생하기 이전에 건실한 경제 정책을 펼쳤다. 세금을 인하하는 동시에 국방예산 삭감 등을 통해 짜임새 있는 재정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2007년과 2008년 사이에 유럽연합기금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우크라이나와 2012유럽축구챔피언십을 공동 개최하기로 하면서 도로 등 기반시설 구축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폴란드의 국민성도 경제 위기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됐다. 폴란드 통화정책위원회의 쟌 브니스키 위원은 "폴란드인들은 중부 유럽이 패닉에 빠졌을 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소비 패턴도 바꾸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폴란드는 내수시장 규모가 이웃국가인 체코나 슬로바키아에 비해 크다. 그래서 폴란드는 주요 수출 시장인 유럽연합 국가들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내수시장의 힘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또한 폴란드 경제는 국민들의 '냉철한 머리' 덕분에 지난 4월 비행기 추락으로 대통령 등 국가 엘리트를 한꺼번에 잃었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유로존 가입을 서두르지 않았던 것도 호재로 작용했다. PwC폴란드의 비톨드 오를로브스키 경제전략 수석은 "폴란드는 헝가리나 발틱 국가들처럼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외화를 집어삼키지 않았다"며 "또한 즈워티화가 유로화에 고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통화 가치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경제위기에도 폴란드 찾는 기업 많아=폴란드는 특별경제구역을 설정하고 세금 감면 등 인센티브를 내세워 기업 유치에 주력했다. 이런 노력은 경제 위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휘했다. 폴란드 제3의 도시인 로즈(Lodz)는 과거 소비에트 경제권 안에서 섬유도시로 유명세를 타다가 공산주의 붕괴 이후 급속히 쇠퇴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이 지역 실업률이 30%까지 치솟기도 했다. 하지만 로즈는 지난 1997년 폴란드의 14개 특별경제구역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폴란드의 동서남북을 잇는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는 이점 때문에 폴란드 기업 뿐만 아니라 상당수 다국적 기업들이 로즈에 둥지를 틀었다. 델ㆍ인데시트ㆍ보쉬-지멘스ㆍP&Gㆍ후지쯔ㆍABB 등 가전업체에서 화장품업체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업들이 로즈에 공장을 세웠다. 후지쓰의 경우 지난 해 서비스센터 설립을 위해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폴란드의 로즈를 선택했다. 로즈 특별경제구역의 마렉 치에슬락 이사장은 "이름 있는 회사들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됐다"며 "지난 해에도 20곳이 신규 입주 허가를 받았는데, 이는 2008년과 똑같은 수치"라고 설명했다. 물론 경제 위기 여파로 기업들의 투자 규모는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스위스-스웨덴의 합작 엔지니어링그룹인 ABB의 아르투르 르자넥 로즈공장 책임자는 "우리는 모든 게 저렴할 때 이곳에 투자했다"며 "앞으로 수요가 살아날 때를 대비해 제품을 신속하게 생산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고 말했다. ◇재정 적자 축소, 유로존 가입 등은 당면 과제=하지만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아직은폴란드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라고 경고한다. 런던정경대의 스타니슬라프 고물카 교수는 "폴란드는 경제 성장을 지속했다는 성과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선진국들의 경우 평균 경제성장률이 평균 1~2%지만, 폴란드가 속한 신흥 경제국가들의 경우 5%가 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해 GDP의 7.1%까지 확대된 재정 적자도 골칫거리다. 폴란드의 재정 적자 규모는 스페인이나 아일랜드, 영국 등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나 ▦2007년 1.9% ▦2008년 3.7% 등으로 계속 늘고 있다. 특히 소비가 증가하고 있는데도 이전에 단행한 세금 인하 정책으로 인해 세수는 늘지 않고 있다. 고물카 교수는 "2011년 총선을 앞두고 있어 정부가 주도적으로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을 내놓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렉 벨카 신임 폴란드 중앙은행 총재는 "지금이야말로 지출 속도를 줄일 수 있는 적기"라고 자신했다. 또 폴란드 정부는 국영기업 민영화를 통해 250억 즈워티(75억달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유로존 가입은 2015년까지 늦춰질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독립통화정책의 장점을 직접 체험했던 데다 계속되는 유로존 국가들의 재정 위기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최근 "폴란드의 유로존 가입은 현시점에서 정부의 우선순위가 아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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