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풍장' 등 국민 애송시로 사랑 받아온 황동규 시인이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산문집 '삶의 향기 몇 점'으로 독자를 만난다. 올해 일흔이 된 시인은 "산문에 관한 한, 이 산문집은 지금까지의 어느 책보다도 나의 정점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싶다"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일흔을 넘긴 노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말할 정도니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나이 70을 '종심(從心)'이라 했듯 저자는 '마음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느낌 닫는 그대로' 글을 풀어 놓는다. 시인 특유의 섬세한 감성이 산문집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단어와 단어 문단과 문단의 이랑에서 잔잔한 선율이 흐르는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비범을 끌어내는 시인의 탁월함이 경지에 오른 거장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것. 이번 산문집에는 문학은 물론이고 미술, 음악, 기행과 술(酒) 등 삶과 예술에 대한 시인의 가감 없는 정서가 녹아있다는 평가다. 저자가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이란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을까.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멋스러움이 배어나는 문장이며,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나이가 들어도 창작에 대한 열정은 사그러들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상하다. 기억력은 현저히 줄었어도 상상력은 시에서도 산문에서도 줄지 않고 더 끓고 있음을 느낀다. 이 일이 기쁨의 샘도 되고 괴로움의 물줄기도 되었다." 저자의 산문집을 접하는 순간 '인연'의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도 온다. 시인과 피천득 선생이 어디 보통 인연이었던가. 피천득 선생은 황동규 시인의 영문과 스승이었고 선생이 살아 계실 때 그가 매년 세배를 다녔던 은사였다. 음악 저널에 실었던 음반 해설을 비롯해 음악에 대한 시인의 깊은 조예를 엿볼 수 있는 글도 많다. 고등학교 때까지 작곡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는 시인은 그 당시 쉰일곱 해를 산 베토벤보다 꼭 10년만 더 살겠다고 결심했단다. 물론 베토벤보다 10년을 더 산 이후에도 시인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나 마음 가짐은 바뀌어 그 이후의 삶을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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