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스스로를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 선다. 때로는 ‘미녀와 야수’의 괴물로, 때로는 ‘라푼젤’의 주인공으로 변신해 렌즈 속 피사체로 나선다. 또 다른 작가는 저승사자를 자처한다. 저승사자로 분장한 작가는 스스로를 화폭에 담아 관객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건넨다.
사진작가 배찬효(39)와 화가 이정웅(31)의 이색(異色) 2인전 ‘셋업(SET UP)’이 강남 신사동 스페이스K에서 3월 6일까지 열린다. 코오롱그룹의 문화예술나눔공간인 스페이스K는 사진과 회화라는 이질적인 매체에 몸담고 있는 두 명의 젊은 작가를 통해 구성과 연출이 어떻게 작품 속에서 구현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설정한다’는 의미를 지닌 ‘셋업’으로 정했다.
영국 런던에 거주하며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배찬효는 자신이 직접 서양 역사의 실존 인물이나 동화 속 주인공으로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 선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당시 인물의 복식과 배경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는 “유학 시절 동양인 남성으로서 느낀 소외감을 담아내기 위해 동화 속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의 대립 구도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 속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소외와 편견’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여주인공으로 변신해 카메라 앞에 선다. 동화 속에 숨어있던 동서양의 차이와 계급간의 갈등, 약자와 강자의 대비는 그의 작품 속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신데렐라, 백설공주, 라푼젤, 미녀와 야수 등 동화 속 여주인공이 그를 통해 새롭게 해석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는 관람객들도 작품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깨달으며 우리 내부에 잠재된 편견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정웅은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 등 일상적 삶 속에서 자신이 느낀 감정을 작품에 녹여낸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상황을 연극적으로 재구성하고 여러 가지 이미지를 콜라주처럼 캔버스 위에 그려낸다. 특이할 만한 점은 그림 속에서 상황을 인도하는 인물로 작가 자신을 저승사자의 형상으로 그려 넣는 점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높은 위치에 앉아 있거나 남성이 여성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기존 체제가 갖고 있는 허울에 대해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이장욱 스페이스K 선임 큐레이터는 “두 작가의 탄탄한 연출과 구성이 돋보이는 이번 전시는 ‘창작된 설정’을 통해 현대 미술의 한 방법론으로서 ‘설정’을 다시금 조명한다”며 “사진과 회화라는 다른 장르 속에서 두 작가가 ‘설정’의 전략을 어떻게 자신의 작품 속에 풀어내는지 서로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02) 3496~7595.
사진 위는 배찬효 작가의 ‘라푼젤’ 아래는 이정웅 작가의 ‘침묵의 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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