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의 유명한 작품 중 ‘신발’이 있다. 이 작품을 두고 저명한 학자들이 논쟁을 벌였다. 먼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작품의 신발을 농촌 아낙네의 것이라 보고 노동의 고단함에 대한 감상을 밝혔다. 이에 미국 미술사학자 마이어 셔피로는 고흐가 그린 신발은 파리에 사는 도시인의 신발이라며 하이데거를 비판했다. 이들의 논쟁에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가세했다. 그는 구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일침을 가했다. 데리다는 “예술 작품에 대한 궁극의 해석은 있을 수 없으며 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교육자인 송주영 작가는 최근 펴낸 책 ‘그림을 맛있게 먹는 7가지 방법’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며 “(미술에) 좋은 비평은 있어도 정답은 없다”고 했다.
책을 보면서 불현듯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이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예술 작품의 해석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법의 해석에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윤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에도 하나의 정답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법의 해석과 적용에도 정답은 없다. 헌재의 판단은 재판관 다수 의견에 따르지만 그 반대인 소수 의견도 존재한다.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변하면 다수와 소수 의견이 바뀌기도 한다.
대통령 탄핵의 판단 기준은 헌법이나 법률 위반과 그 위반의 중대성이다. 윤 대통령 탄핵심판은 법률 위반보다는 헌법 위반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윤 대통령 탄핵심판은 “형사재판이 아니라 헌법재판”이라고 줄곧 강조했다. 국회 측도 탄핵심판에서 ‘형법상 내란죄’를 다투지 않기로 했다. 헌법은 법률에 비해 추상적인 게 특징이다. 따라서 헌법은 형법보다 법을 위배했는지 판단하기가 모호하다. 같은 헌법 조문에 대한 재판관들의 해석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
헌법재판소가 ‘인간의 법정’인 점도 정답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인간의 판단에는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이 반영된다. 흔히 최고의 법관인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은 오직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고위 법관일수록 자신들의 선택이 국가와 사회의 운명을 결정함을 잘 알기에 본인의 정치적 입장이나 신념에 따라 결정하려는 유혹에 빠지고는 한다. ‘진보’와 ‘중도·보수’로 분류되는 재판관 수에 따라 정확히 갈리는 판결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헌재는 조만간 재판관 표결을 통해 윤 대통령 탄핵심판의 결론을 내릴 것이다. 앞서 헌재는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8 대 0’ 만장일치로 탄핵을 결정했다. 당시 박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재판관도 있었지만 헌재는 설득 끝에 전원일치 결론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헌재의 의견이 갈릴 경우 국론 분열이 심해질 것을 우려해서라고 한다.
이번 윤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도 다수에 반하는 소수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러면 헌재는 이전처럼 만장일치 결론을 위한 지난한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박 대통령 탄핵심판 때와 달리 지금 윤 대통령 탄핵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은 엇갈린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 탄핵 찬성이 56%, 탄핵 반대가 37%로 나왔다.
어차피 윤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에 정답은 없다. 정답이 없는데 인위적으로 정답을 만들어내려 할 필요는 없다.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극심하게 쪼개진 국민 중 한 쪽은 그 결정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만장일치가 헌재의 결정에 절대성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재판관들의 다양한 의견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게 헌재가 할 일이다. 헌재의 결정이 나오면 반대하는 국민들도 다수 의견과 반대 또는 보충 의견에 담긴 각 재판관의 논리를 꼼꼼히 읽어보기 바란다. 자신과 다른 의견도 포용하는 다양성이 민주주의의 힘이다. 그리고 헌재의 결정은 비판 받을지언정 존중돼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굴러간다. 더 이상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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