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이 의과대학 정원 확대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의료계의 물밑 계산이 분주해지고 있다. 정부가 전국 의사들이 총파업을 벌였던 2020년 9월 의사단체와의 합의를 깨고 오는 19일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을 발표한다는 언론보도가 쏟아져 나오면서 의료계는 발칵 뒤집혔다. 대한의사협회를 중심으로 대한개원의협의회,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 등이 한 목소리로 정부 정책에 반대하면서 총파업 가능성도 거론되는데, 대통령실의 의지가 강한 만큼 정원 확대 규모를 최소화하고 의료수가를 높이는 등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 의대 정원 확대, 19일 발표 기정사실화…의료계 ‘발칵’
16일 의료계와 정부에 따르면 오는 19일 보건복지부의 ‘지역 완결적 필수의료 혁신전략’ 발표에서 의대 증원 규모가 확정 발표될 예정이다. 오는 2025학년도 대학 입시 때부터 의대 정원을 1000명 정도 늘리는 안부터 3000명 증원을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돌며 전망치가 풍선처럼 부풀고 있다. 전일(15일) 회의를 가진 당정은 물론 주무부처인 복지부도 공식적으로는 "의대 정원 확대 규모와 시기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입장이지만, 의대 정원 확대 발표는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는 정부의 추진과 의사의 반대가 반복되어 온 쟁점이다. 국내 의대 정원은 2006년 이후 18년째 3058명으로 묶여있다. 2020년 문재인 정부는 의대 정원을 2022년부터 400명씩 늘려 10년 동안 4000명을 증가시키는 등 4대 의료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전국 의사들의 집단 진료 거부 등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양측은 오랜 대치를 벌이다 그해 9월 “코로나19 확산이 안정될 때까지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 의대 신설 추진 논의를 중단하고 협의체를 구성해 법안을 중심으로 원점부터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재논의하겠다”고 합의했다. 올해 초 협의체가 재가동되고 의대 정원 확대에 관한 양측의 합의가 도출되지 않은 상태라 의료계는 "신뢰가 깨졌다"며 격분하고 있다. 2020년과 같은 총파업 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김이연 의협 대변인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의대 정원 증원을 강행한다면 9.4 의정합의 사항을 정면으로 위반하면서 의·정간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며 "준비없는 의대정원 증원은 현장의 혼란만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 당장 내년부터 1000명 늘린다는데…의료계 “정책 추진 근거조차 없어”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11일과 12일에 진행된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의 의대 증원 질의에 "의대 정원 확대 규모와 발표 시기에 대해 확정된 바가 없다"고 해명했다. 단 며칠새 의대 증원을 깜짝 발표하기로 입장을 선회한 데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 등 정치적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당정의 계산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익명을 요한 의료계 관계자는 "(정부가) 아무런 근거 없이 갑작스럽게 1000명, 3000명 증원을 들고 나온 저의가 무엇이겠나. 의료계가 반발하면 줄일 것을 감안했을 것"이라며 "(의대 증원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다수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당장 2025년학년도 대입부터 의대 신입생 정원을 1000명 이상 늘리는 방안이 유력하다. 현재 의대 정원 3058명에서 약 30%를 늘린 규모다. 당초 의대 증원을 추진할 경우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의정합의로 줄였던 351명을 늘리는 방안에 무게가 실렸다. 올 들어서는 감축했던 의대 정원 복원과 함께 국공립대와 정원 50명 미만 의대를 중심으로 최대 512명을 늘리는 안도 거론됐으나, 갑작스럽게 1000명대로 껑충 뛴 것이다. 설상가상 현 정부 임기 내 의대 입학 정원을 최대 3000명 더 늘리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라는 말이 돌면서 의협 집행부 등 의사단체들은 쑥대밭이 됐다.
◇ 흔들리는 의사단체…"증원 규모 현실화·수가 상향" 등 실리론도 고개
정부와 의대 정원 확대 논의를 시작한 것만으로도 의협 내부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지난달부터 수술실 내 CCTV 설치 의무화가 시행됐고, 의사가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 의사면허가 취소되는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이 가결되는 등의 책임을 물어 이필수 회장 등 현 의협 집행부의 탄핵이 추진됐을 정도다.
의협 대의원회는 복지부와 대통령실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의대 정원 확대가 임박했다는 판단 아래 긴급 회의를 열고 이날 오전 성명서를 냈다. 일방적인 의대 정원 확대를 기정사실로 한 보도로 인해 의료계는 물론, 수험생을 둔 학부모와 이공계 대학생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져 우려스럽다는 게 의협 대의원회의 입장이다. 이들은 “국가 의료 체계의 확보는 단순한 산술적 셈법이 아니라 고도로 치밀한 교육 체계와 막대한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재를 선발하고, 엄격한 교육과 수련을 통해 양성되어야 할 의사 과정에 왜곡이 발생하거나 부실화하면 국민에 실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법 정비와 재정 투입 등을 생략한 채 단순히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정치적 발상은 선진 의료를 망가뜨리고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난도 쏟아냈다. 의대 증원 관련 보도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전 회원이 가용한 모든 수단으로 총력 대응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구체적인 대응 방향은 오는 17일 전국 의사대표자 회의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좌훈정 대한일반과의사회장은 지난 15일 대한개원의협의회 학술세미나에서 “필요하다면 (17일 회의 때) 투쟁까지 건의할 예정"이라며 "정부가 의료계 의견을 무시하고, 강압적인 의대정원을 추진하겠다면 지난 2020년처럼 필사즉생의 각오로 싸워야 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의대 증원이 필수의료과 지역의료 붕괴의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우려한다. 의대 정원을 늘리더라도 미용성형 분야 쏠릴 현상을 가속화할 뿐이며, 궁극적으로 분배와 재배치가 병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의대 입학 정원 확대는 10년 뒤 보건의료 환경과 미래 의료수요와 관련되는 사안으로 당장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응급의료 및 필수의료 인력의 부족 문제와는 구분이 필요하다”며 “의사인력 과잉 공급이 가져올 사회경제적 비용 문제도 반드시 함께 검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료계는 물론 국민의 동의를 얻으려면 주무부처인 복지부가 의대 정원 확대 규모를 결정한 공식을 공개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의대 증원 이후 정치적 나눠주기로 전락하지 않고 지역완결적 의료체계가 구축될 수 있도록 배분 방식에 관한 계획도 구체화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수 언론에서 거론되는 1000명 보다는 300~500명 규모가 적당하고, 정원이 50명 이하인 의대 17곳과 의사과학자 양성 대학 설립 등에 배정해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견해다.
대통령실의 의지를 꺽기 어렵다면 터무니 없이 거론되는 의대 증원 규모를 최소화하고, 의료수가를 높이는 등 실리를 챙기는 편이 낫다는 현실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의료계 한 관계자는 "내년 총선 등 정치적 계산이 깔린 상황에서 정책이 강행되는 상황이라 투쟁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파업으로 민심을 잃으면 의료계가 더 불리해질 가능성까지 고려해 신중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경진 기자 realglasses@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