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아들이 과학예술영재학교에서 성적 상위권에 든다는 얘기를 듣고 반색하며 물었다. “전국의 영재 집합소에서도 월등한 성적이라니, 아드님은 챗GPT 같은 최첨단 기술을 만드는 인재가 되는 것 아닌가요? 축하드려요.” “뭘요, 의대 가야죠.”
뜻밖의 대답에 서울경제가 단독 보도(★본지 1월 25일자 1·3면 참조)한 일이 정말 현실에서 벌어지는구나 싶었다.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자퇴생이 매년 증가하는 가운데 자퇴생 10명 중 8명이 자연계열 학생이고 이 중 상당수가 의대·약대 진학을 위한 반수생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요즘 공부 잘하는 이과생들 사이에서는 당장 의대에 진학하지 못할 경우 SKY 이공대는 의대 재도전을 위해 거쳐가는 ‘반수 맛집’으로 통한다는 게 지인의 얘기였다. 과학 영재가 인공지능(AI)이나 로봇·반도체 등 첨단 분야 전문가로 활약하는 미래를 상상했건만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었다.
요즘에는 부모만큼이나 아이들의 현실 인식도 냉정하다. 똑똑한 애들 눈에는 대학·직장·노후를 생각하면 이공계보다 의대에 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우선 대학. 인터넷을 통해 글로벌 수준이 된 요즘 애들의 눈높이에서 볼 때 당장 국내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학문부터가 구닥다리다. SKY 공대 홈페이지와 미국의 한 유명 주립대 공대의 홈페이지를 살펴봤다. 한국 공대의 경우 한 곳에만 극히 일부의 첨단학과가 있고 세 학교 모두 칸막이식 전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반면 미국 공대의 학부 전공은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계산뇌과학·나노사이언스·환경데이터사이언스. 요즘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를 기르기 위한 융복합 학과들이 숱하게 개설돼 있었다.
그다음 직장. 대기업에 취직했을 때 의사에 비해 낮은 기대 소득은 양보 가능한 영역일 수 있다. 살인적인 공부량, 주말도 밤낮도 없는 고된 수련의 생활은 워라밸을 중시하는 요즘 세대가 기피할 만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공서열로 꽉 짜인 조직 문화, 허술하고 불공정한 보상 체계,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할 때 겪을 신산한 중년의 삶을 생각하면 젊을 때 고생쯤은 두 번이라도 택할 수 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인재의 의대 쏠림 현상을 두고 특단의 대책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영재들이 너도나도 피부과·성형외과·치과 원장을 꿈꾸는 나라의 미래 경쟁력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특단의 조치로 이공계 인재에 대한 파격적인 혜택이 거론된다. 하지만 등록금을 전액 면제해준다 한들 의대로 떠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까. 그래봤자 의사의 몇 달치 월급일 뿐이다.
얄팍한 수로는 100세 시대에 인생이 걸린 선택의 문제를 막을 수 없다. 이달 초 윤석열 대통령은 제1차 인재양성전략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방안이 구체적이지도, 문제의식이 심각하지도 않다. 그나마 제시된 지방대 지원은 지엽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낙후된 대학 교육, 기업 문화와 보상 체계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5년 후, 10년 후에도 의대 쏠림은 지속될 것이다. 반값 등록금과 행정 규제의 족쇄를 풀고 대학들이 일류 교수를 초빙해 세상의 변화에 맞게 융복합 학과를 역동적으로 개설하게 해야 한다. 기업들은 합리적인 보상 체계와 기업 문화를 조성해 인재 유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정부 역시 인재들이 창업에 마음 놓고 뛰어들 수 있도록 벤처 투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인재와 기업·대학의 선순환 고리가 착착 연결돼야 SKY가 반수 맛집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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