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대 초반에 사회 초년생이었던 필자에게 찾아온 대학교 후배가 있었다. 한 외국계 보험사에 갓 입사한 그 후배는 보험 가입 실적을 올리기 위해 친척과 친구·선후배들을 분주하게 만나러 다니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보험료가 제법 비쌌지만 후배와의 정을 생각해 그 자리에서 흔쾌히 가입을 했다. 1년 정도 지나자 간간히 오던 후배의 전화가 끊기고 새로운 담당자가 연락을 해왔다. 후배는 몇 달 전 보험사를 그만뒀다고 했다. 마침 보험료에 다소간의 부담을 느끼던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보험을 해지했다. 얼마 되지 않던 반환금은 모두 써버린 기억이 난다.
이제와 돌아보니 당시 보험을 해지한 선택에 후회가 들고 유지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계속 납입했다면 금전적 부담은 있었겠지만 추가적인 연금 바구니가 하나 더 생겨 노후를 보다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보험 상품들이나 연금 상품에 가입했을 때도 유사한 경험이 몇몇 있었기에 아쉬움이 더욱 크다. 금융사에 몸담고 있어 세제 혜택이 있는 신상품에 대한 정보를 비교적 쉽게 접했고 가입도 많이 했지만 만기까지 가져간 상품은 손에 꼽는다. 생애 주기상 많은 일들을 겪고 생각도 계속 변하는 사회생활 속에서 연금과 같은 초장기 상품 운용을 지속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사회 초년생일 때는 느낌조차 오지 않는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연금을 장기간 적립하며 적절히 운용한다는 것이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퇴직연금에서 특정 사유로 인해 중도에 인출한 금액은 2조 6000억 원이며 중도 인출 인원은 6만 9000명에 달한다. 가장 대표적인 중도 인출 사유는 주택 구입이나 임차보증금 마련으로 그 금액이 1조 6000억 원이다. 본인이나 가족의 장기요양 목적(8500억 원), 본인의 파산이나 회생절차(900억 원) 등이 뒤를 잇는다. 연령대로 보면 35세에서 55세까지가 골고루 인출이 많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지나 퇴직연금이 쌓여 목돈의 형태를 띠게 되면 중도 인출해 집을 사거나 임차보증금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근로자들이 퇴직연금을 ‘노후 생활을 위해 장기적으로 잘 운용해야 하는 준비금’이 아니라 ‘필요 시 쉽게 꺼내 사용할 수 있는 비상금’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개인별로 특별한 사유가 있을 수 있고 그 결정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노후 대비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연금은 연금답게 장기간 안정적으로 관리돼야 한다는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제활동 중단으로 정기 소득이 없을 때 연금은 실질적인 급여 역할을 하면서 생활을 책임져주는 중요한 돈이다. 운용 주체인 근로자들이 연금에 대해 ‘인내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금 및 투자 교육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중도 인출 사유 변경 등 제도적 보완을 해나갈 때 연금은 더욱 연금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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