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색 댓잎이 소복한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섰다. 조금 무겁고 다소 시릿해도 허리 구부리고 머리 숙이지 않으니 그래서 대나무다.
후두둑 눈 털어내지 않고 묵묵히 버틴다. 누구를 탓하랴, 내 자리가 눈 맞는 이곳이거늘. 원망도 없다. 겨울이라 내리는 눈이지 않나, 시절을 받아들이고 때를 기다릴 뿐이다. 봄기운이 흙 사이로 스밀 쯤이면 녹은 저 눈이 감로처럼 스미리라.
조선 후기 묵죽(墨竹)을 대표하는 문인화가 수운 유덕장(1675~1756)이 79세에 그린 만년작 ‘설죽(雪竹)’이다. 임진왜란 때 한쪽 팔이 잘리고도 회복해 맨 처음 대나무를 그렸다 하는 탄은 이정(1554~1626), 조선 후기 묵죽화의 대가 자하 신위(1769~1845)와 함께 ‘조선 3대 묵죽화가’로 꼽히는 거장이다. 팽팽한 대나무의 형태부터 낭중지추로 꼽을 명작이나 초록의 색채가 특이하다. 이 정도 녹색 안료로 설죽을 그린 적 있다고 하나 기록으로만 전할 뿐 실제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이 ‘설죽’이 유일하다.
고고한 아취가 색 때문에 흐트러질까 염려해 문인화는, 특히 사군자는 대부분 수묵화이며 이렇게 색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서정적이면서도 정신이 살아있다. 주변 하늘이 아직도 자욱한 것을 보니 함박눈이 이제 막 그친 모양이다. 화가는 대를 그리되 눈은 칠하지 않았다. 대신 어둑한 배경을, 매운 바람과 어두운 대기를 그림으로써 상대적으로 댓잎에 얹힌 눈이 드러나게 했다. 보는 이는 대 잎사귀가 아래로 처져 있으니 여백을 보고도 눈이라 여기게 된다. 눈의 무게로 대나무 가지가 슬쩍 휘기도 했다. 덩치로 무게감 과시하지 않고 근엄한 체하지 않으나 결코 얕봐서는 안 될 강단 있는 기상임을 날렵한 나무와 뾰족한 바위가 대신 말해준다.
대충 훑는다면 얼추 비슷해 보일지 모를 유덕장의 또 다른 설죽 한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화면 왼쪽에서 뾰족 바위가 솟았고 그 틈에서 자라난 대나무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는 점에서 유사한 구도의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의 초록 설죽에서는 대나무 곁 언덕 아래로 난을 피워놓은 것과 달리, 먹으로만 그린 국립중앙박물관의 ‘묵죽’은 바위 하나가 더 놓였다. 대나무 줄기와 댓잎의 간격이 조밀해 더 팽팽한 긴장감을 풍긴다. 필력도 강해 웅장함이 느껴진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하기는 곤란하나, 상대적으로 드문드문 대나무를 배치한 초록 설죽에서 화가 유덕장은 비움의 미학과 여유의 미덕을 보여준다. 댓잎을 칼날 같은 기세로 그렸던 이정의 대나무와 비교한다면 유덕장이 연륜 끝에 터득한 운치를 감지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영조 때의 실학자이며 유덕장의 조카사위였던 이용휴는 “이정의 대나무 그림은 호방하고 빼어나며, 무성하고 장대하여 기세가 뛰어나다. 반면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은 맑고 윤택하며, 흩어지고 비어서 운치가 뛰어나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도 유덕장의 대나무를 가리켜 “탄은(이정)에게 한 수 접어줘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굳세고 푸르며 고졸하여 팔뚝 아래에 금강저(金剛杵)를 갖추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유덕장이 활동했던 18세기 화단은 진경산수화가 단연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묵죽만, 이따금 난도 쳤다고는 전하나 유별나게 대나무에 천착했다. 그는 진주 유씨 명문가 출신이다. 명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6대조 할아버지 유진동도 묵죽으로 이름을 떨쳤고 고조부 유형은 무과에 급제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군을 물리쳤다. 작은할아버지 유혁연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총지휘하며 최고의 무반으로 활약했건만 숙종 재위기인 1680년에 일어난 경신환국(庚申換局)에 연루돼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유덕장의 아버지도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하고 그 기세를 더욱 넓히고자 했으나 치열한 당파싸움과 권력투쟁에 밀려 몰락한 남인(南人) 집안에서 태어난 막내아들, 그가 바로 유덕장이다.
요즘은 ‘삼포세대’를 넘어 결혼과 출산, 심지어 취업까지 포기해버린 ‘N포세대’라 하는데 유덕장은 일찍이 출세를 포기했다. 과거를 보러 갔으나 ‘불리해지자’ 곧 종이를 펴고 먹을 갈아 붓을 휘두르더니 대나무를 그려놓고 즐거워했다. 그에 관한 문헌이 희박한 와중에 가까운 친구였던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이 유덕장의 묘지명에 이같이 적어놓았다. 세속에서 벗어나려 한 그의 태도는 수운(峀雲)이라는 호에서도 드러난다. 무릉도원을 노래했던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인 ‘구름이 무심히 산굴에서 나온다(雲無心而出峀)’에서 유래한 ‘수운’이니 말이다. 그렇게 유덕장은 “항상 꽃을 심고 거문고를 타며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면서” 살았고 삶의 거의 유일한 낙이 대나무 그리는 일이었다.
그런 유덕장의 묵죽화는 중국에까지 유명세를 떨쳐 일찍이 한류(韓流)를 개척했다. 그의 묵죽화에 추사 김정희가 적은 글을 보자면, 한 선비가 중국에 가면서 유덕장의 낡은 대나무 그림을 포장지 삼아 선물을 싸들고 갔더니 청나라의 유명 화가 장도악이 깜짝 놀라 받아들고는 포장지만 귀히 표구해서 벽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안목 있는 사람들이 먼저 알아본 실력파였다는 뜻이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유덕장이 이정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문신 박사해가 남긴 글에는 중국 사람이 조선에서 온 사신에게 대나무는 수운이 으뜸이며 그에 비하면 탄은(이정)의 대나무는 억새일 뿐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유덕장은 가문에 전해온 6대조 유진동의 묵죽을 가까이 접하기도 했지만 당대 최고로 꼽힌 이정의 영향도 받아들였다. 그의 초년기, 중년기 작품에서는 이정의 영향을 적잖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정은 대나무 마디마디의 꺾임이 분명하고 눈발에도 꿋꿋한 대나무의 기세를 강조한 반면 유덕장은 눈 덮인 죽엽(竹葉)을 순응하는 태도로, 그럼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보다 후대의 화가인 신위가 마음으로 포착한 대나무의 모습을 사의적(寫意的)으로 그린 것과 견준다면 사실적이다.
그래서인지 유덕장의 묵죽화는 나 홀로 대나무만 있는 게 아니라 곁에 난초도 두고, 바위도 있으며, 물도 흐르고, 휘영청 만월이 떠 있기도 하다. 즉 유덕장의 대나무는 보통의 묵죽화가 강조하는 절개와 기세에 ‘운치’를 더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안개 드리운 밤 대나무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여백으로 눈을 그렸듯 비워놓은 달은 그 주변의 어둑함으로 밝게 도드라지고, 내려앉은 안개는 지워놓은 듯한 비움을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줄기 굵어진 늙은 통죽은 찢긴 잎 몇 개 남겼을 뿐이지만 조바심 떨쳐낸 여유를 풍기며, 그 곁에는 새 희망을 품은 죽순이 자라나고 있다. 유덕장에게 대나무는 자기 자신이었다. 평생 대나무만 그렸으되 대를 둘러싼 주변 상황까지 두루 살핀 화가. 처한 상황을 절망하는 대신 욕심 내려놓는 지혜를 택하고 살았던 화가의 인품이 고스란히 그림에 담겼다. 수운 유덕장이 그린 ‘비워낸 운치’의 대나무에서 내 속을 비우고 주변을 끌어안는 마음을 배운다. 그림 덕에 노상에 내몰렸어도 한겨울 추위가 덜 매섭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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