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간행된 시문 선집인 동문선(東文選) 이후 이 정도 규모의 산문 선집은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한문의 쓰임새가 사라지면서 죽은 글로 변한 한문 산문을 우리말로 번역해 많은 독자들이 인문 정신의 가치를 음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1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마이크임팩트 스퀘어에서 열린 ‘한국 산문선’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일반 독자에게 한문으로 쓰인 문장은 암호문과 다름없는 글이지만 오늘날 봐도 여전히 보석처럼 반짝이는 문장들을 가시덤불 속에 그냥 묻어둘 수는 없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정 교수의 설명대로 ‘한국 산문선’은 지난 1300년 동안 한 시대를 빛냈던 명문(名文)들을 한데 묶어낸 책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617∼686)부터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1893∼1950)까지 시대별 인물의 산문이 시간순으로 정리됐다. 총 9권의 선집이 불러낸 작가는 229명으로 산문 613편에 원고지 1만8,000장에 달하는 양이다. 613편 가운데 절반 정도는 한글로 번역된 게 이번이 처음이다. 정 교수를 비롯해 우리 고전의 대중화를 주도하고 있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이종묵 서울대 교수와 신진 학자인 이현일 성균관대 교수, 이홍식 성결대 교수,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등 총 6명이 번역·출간 작업에 참여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안대회·정민·이종묵 교수가 참석했다.
정민 교수는 “각 시대의 표정들이 담긴 아름다운 문장들을 ‘통시적인 뷰(view)’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여건은 비할 바 없이 좋아졌지만 인문의 격(格)도 그만큼 높아졌는지는 의문”이라며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될 만한 과거 지식인의 성찰과 고민을 읽으면서 경제 수준에 걸맞은 격을 갖추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물론 이 선집이 독자들에게 부담 없이 다가오는 것은 단순히 한문으로 된 글을 우리말로 번역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선집에 실린 모든 산문에는 짧게는 1쪽, 길게는 3쪽 가량의 역자 해설이 붙어 있다. 원문에 대한 간략한 정보만을 담은 ‘주석’이 아니라 본격 해설이자 비평이라 해도 무방한 글들이다. 원문을 읽으면서 다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생기더라도 바로 뒤에 나오는 해설을 보면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안 교수는 “좋은 글을 엄선하는 것을 넘어 600편이 넘는 글의 맥락과 배경, 작품의 주제 등을 일일이 비평하고 해설한 선집은 유례가 없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선집의 1권은 신라부터 고려까지, 2권부터 9권까지는 조선 시대, 9권 후반부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문장가 32명의 산문을 담고 있다. 일기·편지글·기행문·전기·묘지명·상소문 등 모든 종류의 산문이 총망라돼 있으며 분량이 워낙 방대해 번역·출간까지 8년이 걸렸다고 한다.
책 읽기의 즐거움을 노래한 이황의 ‘도산에 사는 이유’(3권)에는 넉넉한 해학이 넘치고 삼전도의 굴욕 이후 김상헌이 인조에게 바친 상소문인 ‘지금이 상 줄 때인가’(4권)의 행간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결연한 기개가 스며 있다. 이와 함께 영조 시절 여성 문인이었던 곽씨 부인의 ‘남편 김철근 묘지명’은 제목 그대로 남편의 죽음에 슬피 울며 써내려간 글인데 이 산문이 한국 독자들에게 우리말로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밖에 이이가 선배 학자들의 학문을 거침없이 논평한 글과 담배·고구마·코끼리 등 새로운 문물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들도 독자들의 이목을 잡아채기에 충분하다. 각 권 2만2,000원, 세트 16만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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