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은 유난히도 짧을 듯싶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봄의 전령인 벚꽃·진달래·산철쭉이 연구실 너머로 마주 보이는 관악산 자락을 흰색과 연분홍색으로 수놓으며 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다 가고는 했는데 올해는 뭐 그리도 갈 길이 바빴는지 서둘러 떠나버리고 지금은 초록의 산자락만이 희뿌연 미세먼지 사이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이제는 기온도 제법 올라 어느새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느낌이다. 그리고 계절만큼이나 대한민국의 일상 또한 거칠게 지나가고 있다.
대통령은 탄핵됐고 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한 자들이 하나둘 구치소에 수감됐으며 대통령 자신도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됐다. 그 사이 삼 년 만에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는 처참해진 몰골로 국민 대다수가 그동안 기억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아픔까지 함께 끄집어 올렸다. 돌이켜보면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의 침몰은 필시 지난 정권의 몰락을 알리는 불길한 전주곡이었다. 그러나 그 인양이 정권 몰락의 완결과 때를 같이한 절묘한 우연의 일치는 또 한 번 세상사 섭리의 무서움을 깨닫게 한다.
박근혜 정권은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이 사회에 씻기 힘든 생채기를 남겼다. 대한민국의 민심은 ‘촛불’과 ‘태극기’로 극명하게 갈라섰고 이들이 자신에게 갖는 무모한 확신과 상대방을 향해 보이는 무조건적 증오는 앞으로도 꽤 오랜 기간 이 사회의 정치 지형을 특징짓는 고질적 병폐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정권은 지독한 무능과 오만으로 이미 스스로를 정치적 폐족(廢族)이라 일컬은 자들을 9년 만에 적폐 청산 대상에서 주동자로 번듯하게 변신시키는 요술을 부렸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던 자신의 친위세력들마저 소생시키는 기적을 행했다.
1920년대 영국의 위대한 시인 토머스 엘리엇은 장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첫 장에서 이렇게 읊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 죽은 대지 위에 라일락을 키워내고(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mixing/ Memory and desire), 봄비로 무뎌진 뿌리를 깨우고 있다(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그것이 전후 황폐해진 유럽 문명과 이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비정함에 대한 감상인지 아니면 단지 시인 자신의 무기력한 일상에 대한 불평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지난 2개월 동안 국민들은 습관처럼 대권 후보들에게 갖가지 정치적 수사(修辭)를 들어야 했고 그것이 대부분 말의 성찬에 불과함을 잘 알면서도 또다시 습관처럼 아픈 기억과 허망한 희망을 뒤섞어야 했다. 이렇게 우리의 3·4월은 잔인하게 흘러갔고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영광’과 ‘좌절’의 이름표가 각각 정해진 주인을 찾아갈 것이다.
내일 영광의 이름표를 받아든 자들에게는 현재 세월호만큼이나 처참한 몰골로 좌초한 대한민국호를 새롭게 이끌 임무가 주어진다. 과연 그것이 이들에게 끝까지 영광의 이름으로 남겨질 수 있을까. 짐작건대 이들은 앞으로 사사건건 반대하는 상대 진영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겸허해지고 또 겸허해지기를 바란다. 아니라면 이들도 결국은 과거 자신이 전가의 보도처럼 애용한 ‘국회 선진화법’으로 하나도 되는 일이 없이 그렇게 시간만 흘러감을 보게 될 것이다.
앞서 위대한 시인은 슈타른베르크호 너머로 온 호우(豪雨)를 통해 느닷없이 여름이 왔음에 놀랐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 또한 좌초된 지점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오로지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최악의 경우를 ‘느닷없이’ 맞게 될지도 모른다. 내일 영광을 받아들 이들이 전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선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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