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이하 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국 행정부는 크림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합병할 경우를 대비해 러시아의 주요 은행 및 기업들을 대상으로 이란식의 강력한 경제제재에 나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신문은 이 같은 방안이 당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주에 대한 군사행동에 나설 경우에 한해 대응책으로 거론됐으나 크림자치공화국의 분리독립 수순이 가속화되면서 새로운 압박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 소식통은 FT에 "미국이 크림 합병에 대응해 군사력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010년 도출된 포괄적 이란 제재 방안에는 이란 은행·기업 등 150개 기관과 서구 금융기관 간 금융거래를 금지하고 이란 원유수출 대금의 현지송금을 억제하는 강력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미국은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그루지야) 침공 당시에도 이 같은 내용의 금융제재 방안을 검토했다.
이처럼 서구권이 강력한 제재 카드를 검토하는 것은 크림자치공화국의 러시아 귀속 행보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이들의 분리독립을 제어할 서구 측의 수단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세르게이 악쇼노프 크림자치공화국 총리는 이날 의회의 독립선언 직후 기자들과 만나 "통화를 러시아 루블화로 전환하고 러시아와 경제통합을 완성하는 데 2개월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크림자치공화국 최고의회는 공식 국명을 '크림공화국'으로 확정한다고 공고했다.
영국 가디언은 12일(현지시간) EU가 크림자치공화국의 분리독립 투표 다음날인 17일부터 러시아 군인·고위 공무원의 서구권 방문 금지와 서구 은행 자산동결 등이 포함된 제재 1·2 단계에 착수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지난주 말 EU 정상들이 도출한 제재방안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정세를 더욱 악화시킬 경우 무기금수 등을 포함하는 보다 강력한 3단계 통상 경제제재 방안을 실시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어 EU의 제재 수위 역시 높아질 수 있다.
서방의 러시아 금융제재 가능성이 고조되면서 시장은 이미 기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FT는 "스위스 은행에 러시아 고객들의 문의전화가 폭주하고 있다"며 "러시아에서 국외 자본이탈이 급증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신문에 따르면 현지 대출금리가 급등하며 해외 투자자들의 러시아 기업 투자가 사실상 동결된 상태여서 제재가 본격화될 경우 현지 기업들의 자금난은 더욱 악화될 공산이 크다. 이로 인해 씨티은행은 이날 러시아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 전망치를 기존 2.6%에서 1.0%로 대폭 낮췄다. 여기에 루블화 가치는 지난 한달간 4.87%, 석달 기준으로는 10.28%나 추락하며 러시아 기업들을 옥죄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제재방안은 러시아에 대한 단기적 압박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FT는 "장기적인 금융제재가 현실화할 경우 러시아는 물론 유럽 등 글로벌 경제가 치러야 할 대가가 매우 크다"며 "이란 제재 때와 달리 국제사회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도 험로가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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